5

 

 

다르질링에는 기차역이 없다. 그래서 표를 위탁으로 예매해야 했다. 다음 목적지는 카마수트라로 유명한 카주라호. 기차표를 알아보던 직원은 바로 가는 방법은 없고, 바라나시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로 결정을 하고 돈을 지불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틈만 나면 점유하던 벤치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칸첸중가를 다시 눈에 담았다. 생전 처음 마주한 거대한 자연과도 곧 이별이었다. 내 팔뚝에 헤나를 보고 여자냐고 놀리던 아이와 함께 과자도 먹었다. 어느새 이곳에서 걷다가 앉다가 하면서 별일 없이 지내는 것이 익숙해졌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초우라스타 광장 주변에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다르질링에 와서 신기하다고 느낀 것 중 하나가 지나가는 곳곳에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아이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여기는 이런 게 유행하는가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햇빛이 조금 누그러들 때쯤 여러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왔다. 광장에는 앰프가 설치됐고, 무대 맞은편 단상에는 테이블과 의자 다섯 개가 놓였다. 나는 사람들 틈에 함께 서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를 구경했다. 내 옆에서 무대를 주목하던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춤 경연대회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곧 경연대회가 시작됐다.

익숙한 팝송과 낯선 인도 음악들이 앰프를 통해 쿵쿵 울렸고, 참가자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영상촬영을 하는 카메라도 등장했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들이 앉아있는 모양이 우리나라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았다. 광장의 모든 사람들은 무대에 집중했다. 응원을 하고, 함께 몸을 들썩이기도 했다. 소품을 이용해 이야기가 있는 공연을 펼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연기를 하기도 했다.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할 때쯤 모든 경연을 끝났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는지 자동차를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경연이 끝나자 이내 다시 조용한 마을로 돌아왔다. 예매한 표를 받기로 한 시간이 되어서 바라나시로 가는 표 한 장,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로 가는 표 한 장을 받아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지사제를 사왔다. 나는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나을 줄 알았던 설사는 멎을 줄을 몰랐다. 하루 세 끼를 숨 쉬는 것처럼 지키던 내가 거의 열흘 가까이를 한 끼나 두 끼만 먹었더니 식욕이 그리웠다. 숙소에 오자마자 약을 한 알 삼키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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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당연하게 다르질링에는 차를 파는 곳이 많은 편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순대골목, 떡볶이거리처럼 빽빽한 밀도의 경쟁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광장 쪽에 두 개의 가게가 붙어 있고, 언덕 아래쪽에 두세 군데 정도 본 것이 전부다. 그래서 어디가 진짜 원조집인지 고민해야할 필요가 없었다.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넓지 않은 공간에 수많은 찻잎들이 각종 크기의 포장에 쌓여있거나, 밀폐된 유리병 안에 들어있었다. 다르질링, 아쌈 등 찻잎의 원산지와 수확 시기, 어떤 향이 나는지도 쓰여 있었다. 가게 한편에서는 몇 명의 사람들이 찻잎의 무게를 달아 포장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이거야말로 프랑스에서 생수를 떠오거나, 남태평양에서 참치를 직접 공수해오는 것이 아닌가.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눈이 몇 번이나 마주쳤음에도 사람들은 내게 무신경했다. 직원에게 안내를 요구했다. 그제야 직원은 나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녹차와 홍차, 특별한 향이 있는 차 등 메뉴가 너무나도 다양했다. 가격도 차이가 컸다. 가장 기본적인 다르질링에서 수확한 홍차를 주문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자연 그 자체였다. 봉우리와 조금 더 먼 봉우리, 그것보다 조금 더 먼 봉우리. 가방을 열어 수첩과 펜을 꺼냈다. 그리고 남은 예산과 선물에 쓸 수 있는 돈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내 앞에 투명한 받침이 내려왔고, 그 위로 투명한 찻잔에 담긴 홍차가 올려졌다. 이내 찻숟가락과 설탕이 담긴 통까지 모두 준비가 되었다. 태양과 가까운 곳에서 그 빛을 받아가며 자란 잎,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차를 생산해 온 전통까지. 찻잔에 담긴 것은 붉은색도, 녹색도, 노란색도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색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더없이 맑아 보이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홍차 중 하나인 다르질링의 홍차, 잔을 들어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목으로 넘겼다. 뭐랄까.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겐 차에 대한 경험이 없었음을. 기껏해야 티백에 담긴 현미녹차정도 마셔본 나는 이 묘한 향의 가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혹시 갑작스레 차에 눈을 뜨지 않을까 싶어서 아주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찻잔의 차가 줄어들면서 선물 리스트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차를 고르기 시작했다. 스스로 책정한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서 선택권이 그리 높지 않았다. 당연히 포장에 따라 차 가격이 달랐다. 껌의 내포장지로 쓰이는 재질과 유사한 종이의 거대한 버전이랄까, 그런 포장지에 끈으로 묶는 포장에 다르질링에서 재배된 차를 골랐다. 수확 시기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르다고 했지만 그 차이가 크지 않길 바라면서 저렴한 것을 골랐다. 직원이 그것들을 한 덩이마다 신문지로 다시 포장한 후 쇼핑백에 담아서 내게 건넸다.

숙소로 돌아와 배낭의 가장 깊숙한 곳에 쇼핑백을 집어넣었다. 처음으로 짐이 늘었다. 아직도 인도에 머무를 시간은 꽤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다시 돌아갈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출발할 때부터, 그리고 여행 중에도 항상 생각했다. 그 날의 즐거움, 그 순간의 행복을 즐기자고. 하지만 또다시 짐을 늘리고 있었다. 이 무게가 다르질링에서 직접 사온 차를 건네는 내 모습이 아니라, 차를 받을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이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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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사람이세요? 아직 안개가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초우라스타 광장에서 각자의 일과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고개를 돌렸더니 우리나라말을 하는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스미마셍, 이라고 모른 채 할까 하다가 나도 우리말로 답했다. 친화력을 수치로 따졌을 때, 내가 1이라면 그는 3정도 돼보였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서로 프라이버시를 존중했다. 개인적인 것은 묻지 않으며 여행 경로와 다녀온 곳 중에 어떤 곳이 좋았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나와 비슷한 경로로 다르질링에 왔으며, 무려 5일간 이곳에 있을 예정이었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고 아침식사로 그는 야채, 나는 고기만두를 먹으면서 함께 차밭을 보러 가기로 결의했다.

약간의 정비 후에 우리는 약속된 시간에 광장에서 만났다. 그가 가져온 가이드북에는 여러 체험을 할 수 있는 차밭들이 소개되어있었다. 하지만 경비의 최소화를 위해 직접 아무 차밭이나 가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아래쪽에 위치한 녹색 밭이었다. 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와 바위를 이용해 간이로 만든 계단 등을 내려갔다. 길을 가로지를 수 없기에 골목골목을 따라서 걸었다. 마당도 구경하고 가축도 구경했다. 많은 생활들을 마주쳤다. 어느 집 마당을 지날 때였다. 다섯 명의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꼬마들은 마당에서 뭔가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내가 치즈. 하고서 사진을 찍자 아이들이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어주었다.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차밭 가는 길을 물었다. 그렇게 꽤나 걷다보니 차밭이 나왔다. 지금은 1. 겨울이었다. 수확이 끝나고, 가지가 잘렸을 앙상한 갈색 밑동만이 보였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갔다. 아래쪽에는 초록색 밭이 보였기 때문이다. 수확 후에 잘라낸 것일까. 볼품없는 초록 나무들이 주욱 도열한 곳에 도착했다. 당최 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없지만 차나무 밭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그 곳에서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약간 허무함을 느꼈다. 동행했던 친구도 몇 장 사진을 찍더니 돌아갈 길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눈치였다.

올라오는 길은 역시 힘들었다. 우리는 무언의 경쟁심으로 쉼 없이 묵묵히 오르막을 걸어 올라갔다. 역시 고도가 높아 공기가 선선했다. 역시 하늘과 가까워 햇빛은 강렬했다. 땀을 식히고자 겹쳐 입었던 옷들을 하나하나 벗었다. 누구의 승리도 없이 무언의 경기를 마친 우리는 최대한 숨을 고르며 시내에 들어섰다. 식당에서 피자를 먹었다. 여전히 대화는 적었지만 친근함은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서로의 남은 여행에 행운을 빌어주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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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뉴잘페구리에서 실리구리까지, 다시 실리구리에서 다르질링까지 가는 지프를 탔다. 이동거리가 꽤 긴 편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지프를 추천했다. 역 앞에서는 지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일단 빈 지프에 타고, 모든 자리에 사람이 채워지면 출발하는 방식이었다. 역시 가격 협상을 한 후에 지프에 올랐다. 내 배낭을 포함한 사람들의 짐은 모두 지프의 천장에 묶였다. 실리구리까지는 일반적인 도심을 지나고 평지를 이동했다. 실리구리에서 출발한 지프는 산속 도로를 오르면서 마을이 나타나면 사람들을 태웠고, 다른 마을이 나타나면 사람들을 내렸다. 그 인원도 제각각이어서 바닥에 앉는 사람이 생길 때도 있었다. 나는 앞좌석에 탔기 때문에 자리가 고정되어 있어 자리를 좁힌다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바닥의 요철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다이내믹한 승차감에 머리를 조심해야했다. 분명 계속 올라가고 있는데 길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져있었다. 이렇게 올라가도 되나 싶을 때쯤 지프가 멈춰 섰다. 이곳이 다르질링인가 하고서 내렸는데 잠깐 쉬었다가 올라간다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군것질거리를 사고 마실 것을 마셨다. 나에게도 권했지만 나는 내 배를 가리키며 얼굴을 찌푸리는 것으로 나의 상태를 설명하며 거절했다. 주변을 돌아봤다. 아래쪽 끝도 위쪽 끝도 보이지 않았다. 속을 한 번 비우고 갈까 싶어 화장실을 물어봤다. 벽과 천장만 있던 화장실에선 어떤 아저씨가 큰일을 치루고 계셨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와 지프에 앉았다.

다르질링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열차 레일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식 열차가 다니는 것은 아니고, 별칭 토이트레인인 작은 열차가 다니는 길이다. 토이트레인은 무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속도가 매우 느리고 매연이 엄청난데다가 비싸기까지 하다는 이야기에 타보진 않고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올라가는 길에 만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지만 볼 수는 없었다.

레일을 지나치고도 한참을 더 올라갔다. 이미 몇 개의 마을을 지나쳤기 때문에 새로운 마을이 나와도 혹시 이곳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창밖 풍경을 보다가 반가운 광고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높은 곳에 무려 캔터키프라이드치킨이라니. 꼭 먹어 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지프 밖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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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도 기차 좌석에는 여러 등급이 있다. 땅이 워낙 넓다보니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침대칸을 이용한다(고 한다). 델리에서 바라나시까지는 2AC, 무갈사라이에서 뉴잘페구리까지는 3AC를 탔다. AC는 에어컨, 앞의 숫자는 몇 층 침대인가를 나타낸다. 당연히 2AC보다 3AC가 저렴했다. 그보다 저렴한 좌석은 SL클래스가 있다. 슬리퍼칸이라고 부르는 SL클래스는 3층 침대에 천장에는 선풍기가 달려있다고 한다. 요즘은 날씨가 더운 편이 아니라 에어컨과 선풍기를 켤 필요가 없기에 SL칸 표를 끊을까 했다. 하지만 저렴한 대신 도난위험이 있다는 글들을 보고 나는 3AC좌석을 택했다. 나는 예약한 3층에 자리를 잡았다. 누워있는 것 외에는 다른 자세를 취할 수 없었다. 열 두 시간 내내 잘 수는 없었기에 미리 휴대폰에 담아온 소설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을 거르니 배가 고팠다. 점심때 쯤 식사를 주문받는 승무원에게 식사를 주문했다. 도시락을 받아들고 나니 정상적으로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1층에는 인도인 가족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 같이 좀 먹읍시다.’ 하고 싶었지만 장소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런 너스레가 갑자기 나오지는 않았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허리를 60도쯤 굽히고 힘겹게 도시락을 먹고 물을 넉넉히 마셨다. 식사를 마친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그동안 한껏 민감해진 장에 채웠으면 비워야한다는 자연의 섭리가 빠르게 찾아왔다. 사실 마음 깊은 곳으로 언젠가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번뇌 끝에 마음을 굳게 먹고 물티슈를 주머니에 챙겨서 1층으로 내려왔다. 허리에 뻐근함이 느껴졌다. 슬쩍 스트레칭을 하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 나를 괄약근에 더욱 집중하도록 했다. 화장실 문을 마주하니 두려웠다. 문에는 정차 중에는 사용하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했다. 문을 여니 예상했던 농후한 암모니아향이 코를 괴롭혔다. 좁은 공간엔 은색으로 반짝이는 스테인리스로 된 재래식 변기가 있었다. 어느 방향을 보고 앉아야 할지 걱정할 필요 가 없도록 친절하게 발을 올려두어야 할 부분에 표시도 되어 있었다. 조준점 부분에는 구멍이 있었다. 그렇다. 구멍. 그 구멍을 통해 레일이 빠르게 지나는 것이 보였다. 문 앞에 적혀있던 정차 중에 사용하지 말라는 문구가 자연스레 납득되었다. 한껏 영역표시를 하던 중에 적절한 높이, 그러니까 앉아서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곳에 위치한 수도꼭지를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그 용도가 짐작되었다. 물론 현지의 관습을 존중하지만, 어떤 손을 사용해야 하는지 여전히 몰랐던 나는 물티슈를 사용했다. 내 안의 모든 것을 비운 후 혹시 바닥에 넘어질까 싶어 조심스레 복장을 단정히 했다. 이제 내게 남은 과업은 다음 사람을 위해 처참한 분출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변기의 스테인리스는 벽까지 이어져있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이어진 그곳에는 밸브가 있었다. 밸브를 열었다. 츄슉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흘러내렸다. 인도에서의 열차 화장실 첫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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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오토릭샤. 많은 사람들이 툭툭이라고 부르는 이 탈것은 바퀴가 세 개다. 운전석은 앞에, 손님이 탈 수 있는 공간은 뒤쪽에 위치해 있으며, 그 뒤에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대부분의 툭툭은 인도를 상징하는 노랑, 초록색이 적당히 배치되어 있다. 물론 라이트며, 사이드 미러 등 있을 건 거의다 있다. 다만 문짝이 없다. 대략 24킬로미터를 툭툭으로 이동하는 길은 익사이팅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경적은 급박한 상황에서 눌려지지만 인도의 차에서는 쉴 새 없이 울린다. 문짝이 없었기에 사방에서 울리는 경적소리와 뿜어져 나오는 매연, 밤이라고 나아지지 않았을 스모그 그 자체인 공기, 공기저항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릭샤왈라가 처음에 제안한 750루피를 450루피까지 깎았을 때의 뿌듯함은 이미 사라졌다. 타는 내내 혹여나 배낭이 밖으로 떨어질까 봐 짐칸에 고정시킨 후 한 쪽 팔을 걸어두고 긴장하고 있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다리를 건너고 한적한 도로를 지나다가 릭샤왈라가 갑자기 툭툭을 세웠다. 그는 조금 긴장하고 있는 내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약간의 돈을 들고 가서 자신의 신에게 간단한 의식을 하고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출발했고, 나는 그 사이에 얇은 패딩을 입고 마스크도 착용했다. 처음 가보는 길인데다가 긴장을 해서 그런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작은 상가들이 몰려 있는 거리를 지나 마침내 무갈사라이역에 도착했다. 나는 우선 그에게 약속한 돈을 지불했다. 또 그 어둠과 바람을 헤치고 나를 안전하게 이곳까지 데려다 준 수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뭔가를 주고 싶어서 커피믹스를 선물했다.

역 안 전광판은 열차가 세 시간 연착됐음을 알리고 있었다. 새벽 3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너무 늦은 시간엔 툭툭을 타고 갈 수 없을까봐 여섯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연착이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담요를 가져와서 덮고 느긋하게 앉아있거나 누워있었다. 나도 자리를 잡았다. 적당한 벽에 배낭을 세워두고 바닥에 종이를 깔았다. 등을 기댔다. 자다 깨다를 몇 번 반복하면서 인도 열차 앱으로 지금 기차가 어디쯤에 있는지 수시로 체크했다. 그러던 중에 어떤 할아버지가 내 앞으로 왔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지 계속해서 힌디어로 나에게 표를 보여주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많은 인도인들이 있는데 왜 하필 나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하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힌디어는 안녕하세요, 꺼져, 감사합니다. 세 개 뿐이었다. 수 분간의 교감 끝에 나는 노인의 의중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실시간으로 열차 시간을 확인하는 나를 보고 자신의 기차가 언제 도착하는지가 알고 싶었다. 나는 기차표에 적힌 열차 번호를 입력하고 언제 도착하는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어디서 타야 하는지 숫자와 그림을 종이에 적어가며 설명해줬다. 여위고 주름진 검은손으로 종이를 받아들며 할아버지는 내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외국에서조차 고맙다는 말에 어떻게 대처해야할 줄 몰랐다. 일어나 고개를 함께 숙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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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행자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에서 추천하는 카페에 왔다. 기대와는 달리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의 카페였다. 우리나라에서 모던한 인테리어 카페에 온 것과 뭐가 다른가. 직원이 건넨 메뉴판에 한글로 신라면 이라고 적혀있었다. 아직 한국음식이 그리울 때는 아니었다. 와이파이로 혹시 지나쳤을 정보들을 탐색하고 있을 때 훤칠하고 멀끔하게 생긴 서버가 쟁반을 내 앞에 놓았다. 비염환자마냥 고개를 숙여 코로 김을 쐤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식욕이 일었다. 약간 싱겁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같이 나온 길쭉한 쌀로 지은 덜 끈적이는 밥과 레몬즙으로 식초를 대신한 단무지 역시 만족스러웠다. 카페 직원이 나를 의식했는지 한국노래가 공간을 메웠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씩 싱거운 한국음식과 한국노랫말이 나를 이렇게나 만족시키다니. 호란의 그윽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릇들을 모두 비운 후 나는 수첩과 펜을 꺼내 오늘 할 일들을 한 줄에 하나씩 적었다.

유심 만들기, 알리바바바지, 슬리퍼, 기차표 예약하기네 줄을 적고나니 더 이상 적을 것이 생각나질 않았다.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유를 부릴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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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어릴 적 좁은 시장골목에서 엄마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긴장했던 때가 떠올랐다. 크고 작은 조각들을 파는 할아버지, 다양한 브랜드의 옷을 걸어두고 파는 아저씨, 길을 돌아다니며 악기를 파는 청년, 옆을 수시로 지나는 릭샤왈라들이 말을 걸어왔다. 숙소 앞 로터리를 중심으로 조금씩 범위를 늘려 왔다가 갔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오리엔탈리즘에 심취한 듯 수행자인양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거적을 두른 금발의 청년이 지나가는가 하면, 네댓 명의 어린 남자들이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며 내 옆을 지나치기도 했다. 그렇게 목적 없이 걷다가 문득 왜 이곳에 왔는지 명확히 하고 싶어졌다. 기억을 더듬어봤다. 가장 처음 인도에 가겠다고 생각한 것은 7년 전이었다. 그러니까 스물 둘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계기는 생각이 나지 않으나 그때의 기분은 기억이 났다. 배를 타면 무조건 비행기보다 돈이 덜 들것이라 생각했고, 수첩에 계획을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셀 수 없이 많은 바람들 중 하나의 씨앗이 심어졌다. 갑자기 툭 하고 싹이 트인 인도 여행. 그 계기는 그럴듯했다. 시험에서의 낙방. 수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떨어졌고, 떨어지는 중이다. 나는 시험에서의 실패에 대해 그들과 다른 대처를 하고 싶었다. 난 소수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 나의 선택, 내가 속한 집단, 나의 취향이 소수임을 확인할 때 내 희귀함이 인정받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문득 떠오른 오래전의 바람. 머리 보다는 가슴이 시키기는 했으나, 가슴 깊숙이에서 우러나온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언제나 그랬듯 결정은 한 순간이었고, 열흘 후에 나는 배가 아닌 비행기로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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