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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2 머리카락을 지켜라
글
야호!
but, 소박한 원고료의 소박함이란
안녕? 난 10년 후의 너야. 믿고 싶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물론 이 꿈이 깨고 나면 넌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어렴풋한 느낌만 남아도 충분히 성공이라고 생각해. 아니, 오히려 더 좋아. 평행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난 너지만 넌 내가 아니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너는 최대한 너의 개성을 유지하도록 해. 나도 그렇게 살았거든. 남에게 따라할 점을 배우기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세기는 방향으로 말이야. 그렇게 살았더니 이 꼴이 됐어.
어차피 기억 못할 테니 간단하게 말해주자면 넌 지금 입학한 4년제 대학을 8년 후에 졸업하게 될 거야. 무슨 개소리냐고? 진짜야. 뭐 딱히 건강상의 문제라던가 그런 심각한 문제는 아니고 다단계로 휴학 한 번, 실연의 아픔으로 인한 정체성 혼란으로 학교에 가지 않게 되어 학사경고 한 번, 광고회사를 만들겠다고 휴학 한 번, 신춘문예를 위해 휴학 한 번 하게 될 거야. 물론 사업이며 등단이며 성공한 건 하나도 없어. 혼란스럽겠지만 받아들여. 뭔가에 홀린 듯 빠르고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시작하게 되어있어.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이걸 이야기 하지 않았다면 그때의 그 숙명적인 느낌들이 없었을까?
다행인건 앞에서 이야기 한 몇몇 사소한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후회하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거야. 인생 선배로써 꿀팁을 하나 줄게. 학고장이 날아오기 전에 학교 홈페이지에서 주소를 바꿔두도록 해.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모르셔. 모두가 슬프지 않게 된 훌륭한 전략이었지. 그리고 기쁜 소식이 몇 가지 있어. 하나는 올해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럼 그동안은 돈을 안 벌었냐고? 응.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려고 하지 마. 조만간 바뀔 것 같으니까. 두 번째 기쁜 소식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인도에 작년에 다녀왔다는 거야.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왜냐하면 임용고시에 두 번 떨어졌거든. 근데 차라리 올해 다녀올걸 그랬어. 작년에 벌써 인도에 갔다 와서 올해는 그냥 한국에서 마음을 추슬러야 했으니까. 몇 가지 있다고 했는데 기억이 더 이상 나질 않는다. 뭐 그래도 지금까진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어.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꿈속에서 너를 찾게 된 데에는 하나 큰 이유가 있어. 그것은 바로 머리, 머리 때문이야. 헤드가 아니라 헤어. 지금 너는 타고난 모발은 얇지만 하나의 모공에서 머리카락이 두세 가닥 비집고 자랄 정도로 괜찮은 밀도의 건강한 두피를 지니고 있을 거야. 아, 지금 첫 호일 펌을 하고 있을 때인가? 내가 대여섯 번 해봐서 아는데, 그 한 번으로 만족하고 살도록 해. 다른 파마보다 훨씬 두피에 좋지 아니하단다. 너도 알다시피 너를 중심으로 친가 외가를 통틀어서 2대 내에 대머리인 식구는 존재하지 않잖아? 그리고 대머리는 한 대를 건너뛰어 유전이 된다고 알려져 있지. 우리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를 떠올려봐. 두 분 모두 굵고 빽빽한 머리숱을 가지고 계시잖아. 이쯤 되면 넌 머릿속에 반짝거리는 인물들의 몽타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굉장히 불안하겠지. 다행히도 대머리는 아니야. 하지만 명백한 탈모증상이 나타나는 중이야. 물론 갓 스무 살인 네가 이 불안을 어떻게 통감할 수 있겠냐마는 난 꼭 전해야겠어.
난 머리터럭에 너무 집착했어. 자르면 다시 자란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의 법칙이 내 머리털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믿었던 거지. 수많은 파마, 탈색과 염색을 통해 두피는 오염되어갔고,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진 모근들은 본격 이주준비를 시작했던 거야.
결정적인 한 사건은 훈련소에 입소하기 열흘 쯤 전이야. 난 흰머리가 하고 싶었고, 삼일에 걸쳐 천오백 원짜리 탈색약 여섯 개를 구입했지. 난 아저씨의 말을 좀 더 새겨들었어야 했어. 아저씨는 말했어. "그러다가 아저씨처럼 된다." 그는 선배 탈모인이었거든. 난 6일간 매일 탈색을 하기 시작했지. 두피가 화끈거리고 머리카락들이 부서졌어. 기대하던 흰머리가 되지는 못했지만 난 몹시 밝은 톤의 머리카락을 얻었어. 그렇게 나는 유니크한 머리색깔을 삼일정도 즐긴 후에 머리를 밀고 훈련소로 갔어. 이 모든 만행들은 자르면 다시 자랄 거라는 믿음에서 시작한 거야. 물론 다시 자랐어. 하지만 그 후에도 난 몇 번의 파마와 염색을 했어. 두피에 아포칼립스가 점점 다가오고 있던 거야.
어떤 병에는 이런 접두어가 붙어. '신경성'.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소리지.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소리도 있잖아? 자고 일어나면 거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타고난 무심함에도 노량진의 반복적인 수험생활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생성해냈어.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거울에서 동해바다를 봤어. 기억할거야. 가까운 대천이나 서천 바다만 봐오던 네가 동해바다에 처음 갔을 때 느꼈던 그 충격 말이야. "세상에나, 바닥이 보여." 그래. 머리와 머리를 갈라 가르마 사이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허연 두피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거야. 탈모란 놈은 그렇게 전희 없이 한순간에 나와 하나가 되었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대머리였다면 난 운명을 받아들였겠지. 하지만 난 타고난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저항하고 싶었어. 밝고 희망찬 생각들과 의식적인 웃음, 꾸준한 운동으로 몸과 마음을 점점 가꾸기 시작했어. 스트레스성 탈모의 무서움이 뭔 줄 알아?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어도 머리를 감을 때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을 보면 다시 스트레스가 생기는 거야. 그러면 머리카락은 다시 빠질 테고,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나는 다시 스트레스를 받겠지. 무한루프야. 답이 없지.
어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니? 다른 건 잊어도 괜찮아. 어떻게 살던 모든 삶엔 그마다의 너무 가치가 있어. 하지만 이건 다른 차원의 문제야. 꼭 기억해. 머리숱이 없다는 것은 노안으로써 훌륭한 충분조건을 갖추는 거야. 머리숱이 없다는 것은 그만한 자신감의 하락을 가져오기도 하지. ‘대머리 vs 고자 되기’의 유명한 난제가 있을 정도라니까. 탈모를 우습게 보지마. 적어도 서른 안에는 머리를 심는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거야. 비싸거든. 이번 생의 난 글렀어. 나의 목표는 비록 현상유지지만, 너만은 꼭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두피를 유지하여 건강하고 윤기 있는 모발을 유지하길 바라.
마지막으로 이야기할게. 돌이켜보면 참 재미있고 특별한 인생이야. 큰 걱정 하지 말고 꼴리는 대로 살아. 자외선 조심하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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