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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르질링에는 기차역이 없다. 그래서 표를 위탁으로 예매해야 했다. 다음 목적지는 카마수트라로 유명한 카주라호. 기차표를 알아보던 직원은 바로 가는 방법은 없고, 바라나시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로 결정을 하고 돈을 지불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틈만 나면 점유하던 벤치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칸첸중가를 다시 눈에 담았다. 생전 처음 마주한 거대한 자연과도 곧 이별이었다. 내 팔뚝에 헤나를 보고 여자냐고 놀리던 아이와 함께 과자도 먹었다. 어느새 이곳에서 걷다가 앉다가 하면서 별일 없이 지내는 것이 익숙해졌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초우라스타 광장 주변에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다르질링에 와서 신기하다고 느낀 것 중 하나가 지나가는 곳곳에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아이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여기는 이런 게 유행하는가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햇빛이 조금 누그러들 때쯤 여러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왔다. 광장에는 앰프가 설치됐고, 무대 맞은편 단상에는 테이블과 의자 다섯 개가 놓였다. 나는 사람들 틈에 함께 서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를 구경했다. 내 옆에서 무대를 주목하던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춤 경연대회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곧 경연대회가 시작됐다. 익숙한 팝송과 낯선 인도 음악들이 앰프를 통해 쿵쿵 울렸고, 참가자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영상촬영을 하는 카메라도 등장했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들이 앉아있는 모양이 우리나라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았다. 광장의 모든 사람들은 무대에 집중했다. 응원을 하고, 함께 몸을 들썩이기도 했다. 소품을 이용해 이야기가 있는 공연을 펼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연기를 하기도 했다.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할 때쯤 모든 경연을 끝났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는지 자동차를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경연이 끝나자 이내 다시 조용한 마을로 돌아왔다. 예매한 표를 받기로 한 시간이 되어서 바라나시로 가는 표 한 장,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로 가는 표 한 장을 받아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지사제를 사왔다. 나는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나을 줄 알았던 설사는 멎을 줄을 몰랐다. 하루 세 끼를 숨 쉬는 것처럼 지키던 내가 거의 열흘 가까이를 한 끼나 두 끼만 먹었더니 식욕이 그리웠다. 숙소에 오자마자 약을 한 알 삼키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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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 다르질링에는 차를 파는 곳이 많은 편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순대골목, 떡볶이거리처럼 빽빽한 밀도의 경쟁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광장 쪽에 두 개의 가게가 붙어 있고, 언덕 아래쪽에 두세 군데 정도 본 것이 전부다. 그래서 어디가 진짜 원조집인지 고민해야할 필요가 없었다.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넓지 않은 공간에 수많은 찻잎들이 각종 크기의 포장에 쌓여있거나, 밀폐된 유리병 안에 들어있었다. 다르질링, 아쌈 등 찻잎의 원산지와 수확 시기, 어떤 향이 나는지도 쓰여 있었다. 가게 한편에서는 몇 명의 사람들이 찻잎의 무게를 달아 포장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이거야말로 프랑스에서 생수를 떠오거나, 남태평양에서 참치를 직접 공수해오는 것이 아닌가.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눈이 몇 번이나 마주쳤음에도 사람들은 내게 무신경했다. 직원에게 안내를 요구했다. 그제야 직원은 나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녹차와 홍차, 특별한 향이 있는 차 등 메뉴가 너무나도 다양했다. 가격도 차이가 컸다. 가장 기본적인 다르질링에서 수확한 홍차를 주문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자연 그 자체였다. 봉우리와 조금 더 먼 봉우리, 그것보다 조금 더 먼 봉우리. 가방을 열어 수첩과 펜을 꺼냈다. 그리고 남은 예산과 선물에 쓸 수 있는 돈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내 앞에 투명한 받침이 내려왔고, 그 위로 투명한 찻잔에 담긴 홍차가 올려졌다. 이내 찻숟가락과 설탕이 담긴 통까지 모두 준비가 되었다. 태양과 가까운 곳에서 그 빛을 받아가며 자란 잎,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차를 생산해 온 전통까지. 찻잔에 담긴 것은 붉은색도, 녹색도, 노란색도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색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더없이 맑아 보이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홍차 중 하나인 다르질링의 홍차, 잔을 들어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목으로 넘겼다. 뭐랄까.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겐 차에 대한 경험이 없었음을. 기껏해야 티백에 담긴 현미녹차정도 마셔본 나는 이 묘한 향의 가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혹시 갑작스레 차에 눈을 뜨지 않을까 싶어서 아주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찻잔의 차가 줄어들면서 선물 리스트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차를 고르기 시작했다. 스스로 책정한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서 선택권이 그리 높지 않았다. 당연히 포장에 따라 차 가격이 달랐다. 껌의 내포장지로 쓰이는 재질과 유사한 종이의 거대한 버전이랄까, 그런 포장지에 끈으로 묶는 포장에 다르질링에서 재배된 차를 골랐다. 수확 시기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르다고 했지만 그 차이가 크지 않길 바라면서 저렴한 것을 골랐다. 직원이 그것들을 한 덩이마다 신문지로 다시 포장한 후 쇼핑백에 담아서 내게 건넸다.
숙소로 돌아와 배낭의 가장 깊숙한 곳에 쇼핑백을 집어넣었다. 처음으로 짐이 늘었다. 아직도 인도에 머무를 시간은 꽤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다시 돌아갈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출발할 때부터, 그리고 여행 중에도 항상 생각했다. 그 날의 즐거움, 그 순간의 행복을 즐기자고. 하지만 또다시 짐을 늘리고 있었다. 이 무게가 다르질링에서 직접 사온 차를 건네는 내 모습이 아니라, 차를 받을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이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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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이세요? 아직 안개가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초우라스타 광장에서 각자의 일과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고개를 돌렸더니 우리나라말을 하는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스미마셍, 이라고 모른 채 할까 하다가 나도 우리말로 답했다. 친화력을 수치로 따졌을 때, 내가 1이라면 그는 3정도 돼보였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서로 프라이버시를 존중했다. 개인적인 것은 묻지 않으며 여행 경로와 다녀온 곳 중에 어떤 곳이 좋았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나와 비슷한 경로로 다르질링에 왔으며, 무려 5일간 이곳에 있을 예정이었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고 아침식사로 그는 야채, 나는 고기만두를 먹으면서 함께 차밭을 보러 가기로 결의했다.
약간의 정비 후에 우리는 약속된 시간에 광장에서 만났다. 그가 가져온 가이드북에는 여러 체험을 할 수 있는 차밭들이 소개되어있었다. 하지만 경비의 최소화를 위해 직접 아무 차밭이나 가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아래쪽에 위치한 녹색 밭이었다. 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와 바위를 이용해 간이로 만든 계단 등을 내려갔다. 길을 가로지를 수 없기에 골목골목을 따라서 걸었다. 마당도 구경하고 가축도 구경했다. 많은 생활들을 마주쳤다. 어느 집 마당을 지날 때였다. 다섯 명의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꼬마들은 마당에서 뭔가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내가 치즈. 하고서 사진을 찍자 아이들이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어주었다.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차밭 가는 길을 물었다. 그렇게 꽤나 걷다보니 차밭이 나왔다. 지금은 1월. 겨울이었다. 수확이 끝나고, 가지가 잘렸을 앙상한 갈색 밑동만이 보였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갔다. 아래쪽에는 초록색 밭이 보였기 때문이다. 수확 후에 잘라낸 것일까. 볼품없는 초록 나무들이 주욱 도열한 곳에 도착했다. 당최 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없지만 차나무 밭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그 곳에서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약간 허무함을 느꼈다. 동행했던 친구도 몇 장 사진을 찍더니 돌아갈 길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눈치였다.
올라오는 길은 역시 힘들었다. 우리는 무언의 경쟁심으로 쉼 없이 묵묵히 오르막을 걸어 올라갔다. 역시 고도가 높아 공기가 선선했다. 역시 하늘과 가까워 햇빛은 강렬했다. 땀을 식히고자 겹쳐 입었던 옷들을 하나하나 벗었다. 누구의 승리도 없이 무언의 경기를 마친 우리는 최대한 숨을 고르며 시내에 들어섰다. 식당에서 피자를 먹었다. 여전히 대화는 적었지만 친근함은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서로의 남은 여행에 행운을 빌어주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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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웠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추웠다. 침낭에서 손을 꺼내 이불을 걷었다. 번데기가 탈피하듯 침낭의 지퍼를 내려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패딩 때문에 몸이 둔했다. 엉덩이를 이용해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침대 밖으로 발을 겨우 디뎠다. 바닥에는 싸구려 카펫이 깔려있었다. 나무로 된 창문을 열어보니 바깥 풍경이 보였다. 모처럼만에 괜찮은 풍경이 보였다. 언덕 아래 낮은 집들의 옥상과 안개가 그야말로 자연스러웠다. 돈 좀 쓴 보람이 있었다. 발품을 꽤나 팔았음에도 빈 객실이 없거나 비싸다는 이유로 언덕을 조금씩 올라와 광장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다. 그래봐야 만 원 정도밖에 안하지만 그동안 지냈던 숙소들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가격이다. 방은 깔끔했고 심지어 텔레비전도 있었다. 밤새 텁텁해진 입안을 양치로 정화시키고 본격적으로 씻기 위해 카운터로 갔다. 왜 카운터로 갔느냐고?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하면 십 분 정도 후에 양동이로 가져다주는 시스템이다. 보통의 경우에 비싸다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싸다는 것은 불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기꺼이 숙박비를 줄이기 위해 제한된 뜨거운 물을 십 분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생각해보면 프랜차이즈 커피 한 잔 마실 돈이면 훨씬 편해질 수 있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화장실의 요상한 구조상 변기가 그 방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아직도 수분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는 대장 덕에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려야 했다. 화장실에 쪼그려 앉을 때면 뭔가 굉장히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높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변기 옆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왔다. 굉장히 차가운 물이었다. 대야에 직원이 가져다준 양동이의 물과 찬물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머리도 얼굴도 발도 씻었다. 남은 물로는 빨래도 했다.
숙소 등급이 한 단계 정도 오르기는 했지만 아직 조식을 제공받는 수준은 아니었다. 운동화를 신었다. 그것으로 외출 준비는 끝이었다. 가방을 메고 찬찬히 언덕을 내려왔다. 동네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인사를 했다. 안녕 바부.
아침은 길거리에서 파는 모모를 먹었다. 만두다. 고기모모와 야채모모가 있었다. 우리나라와 똑같았다. 약간 향이 다른 것 외에는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새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간단한 표시로 고기가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과자에도 표시가 되어 있다. 초록색 동그라미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고, 빨간색 동그라미는 고기가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생수를 사러 가게에 들렀다가 초록색 동그라미가 있는 라면도 하나 샀다. 그리고는 부셔서 스프를 뿌렸다. 생라면을 집어먹으며 초우라스타광장 벤치에서 햇빛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 산책로를 걸었다. 노점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옷을 걸어두고 있었다. 나는 관심 있는 척 옷들을 구경하면서 떠나는 날 사겠노라며 아주 천천히 이동했다. 벤치에 앉았다가 누웠다가 노래도 들었다가 따라 부르기도 하니 안개가 걷히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더 이상 꼭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무감은 없었다.
산책로는 언덕을 빙 둘러 한 바퀴를 도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피부병에 걸린 개들과 각종 동물들의 배설물들이 부비트랩처럼 널려있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길은 깨끗했고 돌아다니는 개들도 멀쩡했다. 한가롭게 하품을 하며 누워있던 강아지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고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아!”
마음의 소리가 아니었다.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감탄사가! 나에게선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행동이다. 내 시선 끝에는 허공에, 그러니까 파란 하늘에 구름처럼 걸려있는 설산이 있었다. 안경을 벗어 티셔츠로 문질러 닦아 다시 썼다. 신기루도 아니고, 구름도 아니다. 파라마운트 배급 영화가 스크린에 걸린 듯 내 눈 앞에 눈 덮인 산이 걸려있었다. 멀리 있었기에 크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원근을 초월하는 크기의 그 존재에 압도되었다. 갑자기 마주친 산은 나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경외감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철저하게 이성적이라고 생각해왔던 내게서 애니미즘을 발견했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마구 찍었다. 확대해서도 찍어보고 온갖 설정들을 바꿔 찍어보았지만 담기지 않았다. 형태는 찍혔지만 내가 본 그 느낌은 담기지 않았다. 처음으로 있지도 않은 고급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나는 서둘러 산책로를 따라 이리 저리 자리를 옮기다가 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 칸첸중가가 내 앞에 있었다. 그렇게 벅차오른 상태로 나는 몇 시간동안 앉아서 계속 산을 바라봤다. 절경, 비경, 그림 같은 따위의 어떤 형용사로도 형용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를 이곳에 끌어들인 것은 홍차도 뭣도 아닌 칸첸중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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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잘페구리에서 실리구리까지, 다시 실리구리에서 다르질링까지 가는 지프를 탔다. 이동거리가 꽤 긴 편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지프를 추천했다. 역 앞에서는 지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일단 빈 지프에 타고, 모든 자리에 사람이 채워지면 출발하는 방식이었다. 역시 가격 협상을 한 후에 지프에 올랐다. 내 배낭을 포함한 사람들의 짐은 모두 지프의 천장에 묶였다. 실리구리까지는 일반적인 도심을 지나고 평지를 이동했다. 실리구리에서 출발한 지프는 산속 도로를 오르면서 마을이 나타나면 사람들을 태웠고, 다른 마을이 나타나면 사람들을 내렸다. 그 인원도 제각각이어서 바닥에 앉는 사람이 생길 때도 있었다. 나는 앞좌석에 탔기 때문에 자리가 고정되어 있어 자리를 좁힌다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바닥의 요철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다이내믹한 승차감에 머리를 조심해야했다. 분명 계속 올라가고 있는데 길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져있었다. 이렇게 올라가도 되나 싶을 때쯤 지프가 멈춰 섰다. 이곳이 다르질링인가 하고서 내렸는데 잠깐 쉬었다가 올라간다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군것질거리를 사고 마실 것을 마셨다. 나에게도 권했지만 나는 내 배를 가리키며 얼굴을 찌푸리는 것으로 나의 상태를 설명하며 거절했다. 주변을 돌아봤다. 아래쪽 끝도 위쪽 끝도 보이지 않았다. 속을 한 번 비우고 갈까 싶어 화장실을 물어봤다. 벽과 천장만 있던 화장실에선 어떤 아저씨가 큰일을 치루고 계셨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와 지프에 앉았다.
다르질링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열차 레일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식 열차가 다니는 것은 아니고, 별칭 토이트레인인 작은 열차가 다니는 길이다. 토이트레인은 무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속도가 매우 느리고 매연이 엄청난데다가 비싸기까지 하다는 이야기에 타보진 않고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올라가는 길에 만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지만 볼 수는 없었다.
레일을 지나치고도 한참을 더 올라갔다. 이미 몇 개의 마을을 지나쳤기 때문에 새로운 마을이 나와도 ‘혹시 이곳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창밖 풍경을 보다가 반가운 광고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높은 곳에 무려 캔터키프라이드치킨이라니. 꼭 먹어 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지프 밖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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