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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후에 급작스럽게 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인도에 체류할 수 있는 날은 최대 30일이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디서 며칠을 보낼 건지 정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느껴졌었다. 좋으면 더 묵고 싫으면 빨리 떠나자. 라는 생각으로 인도 지도를 프린트해서 가고 싶은 곳들을 표시했다. 그러고 나니 대부분이 북인도 지방이어서 남인도를 제외한 북쪽의 도시들 중 동선 상으로 갈 수 있는 곳들만 연결해서 대략적인 루트가 정해졌다.
다음 목적지는 다르질링이었다. 홍차의 이름인줄로만 알았던 그것이 찻잎이 나오는 지역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인도 여행을 결정하고 난 이후였다. ‘뜨거운 액체를 먹는 것은 국과 찌개정도면 충분하다.’ 는 평소의 지론대로 따뜻한 차를 멀리해온 내게는 무려 세계 3대 홍차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 다르질링의 차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단지 히말라야산맥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나를 끌어당겼다. 날씨가 좋을 때는 칸첸중가라는 산이 보인다고 했다. 산을 좋아하는 것도, 평소 히말라야에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르질링에 가는 최선의 방법을 얻기 위해 거듭된 검색을 마친 끝에 결국 바라나시에서 바로 가는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은 바라나시에서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무갈사라이역으로 가야했다. 오토릭샤를 타고 바라나시역으로 가서 다음날 저녁 기차표를 예매했다. 밤에 타는 기차는 이동과 숙소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받아든 표에서는 12시간에 조금 못 미치는 이동시간이 적혀있었다. 돌아와서는 바라나시의 마지막 날을 즐기기 위해 더욱 영역을 넓혀서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어둑해져 문 닫을 시간이 되자 과일을 떨이로 파는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흥정을 거쳐서 석류와 바나나를 샀다.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몇 가지 과자와 음료수를 샀다. 침대에 엎어져서 과일과 과자를 먹으며 일기를 썼다. 이 평화로운 느낌을 최대한 오래 기억해두고 싶었다.
체크아웃시간이 11시였기에 잠에서 깨자마자 짐을 챙겼다. 내가 가져간 가방은 두 개였다. 친구에게 빌린 등산용 가방과 지갑이나 수첩 등 간편한 짐만 넣어 메고 돌아다닐 수 있는 작은 백팩 하나다. 대충 손빨래로 빨아 말려둔 속옷도 챙기고 친구의 부탁으로 돌아다닐 때마다 산 엽서들도 가방 한편에 넣었다. 가져간 얇은 패딩의 부피를 최대한 줄여보려 이렇게 저렇게 접어 보다가 돌돌 말아 꾹 눌러 공기가 빠졌을 때 여분의 공간에 쑤셔 넣는 것으로 짐정리를 마쳤다. 귀중품들(이래봤자 여권과 나름 고액권의 루피와 달러)을 복대지갑에 넣고 티셔츠 안쪽에 버클을 채우는 것으로 나갈 채비도 완료했다. 아직 열차시간까지는 열두 시간도 더 남았다. 연착될 것을 생각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벌써부터 기차표를 지갑에 고이 접어서 넣으면서 너무 준비에 대한 강박이 심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한데. 그러고 보면 여행은 그런 것 같다. 익숙한 습관과 관습으로 인해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무지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새로운 환경에서 발견한 자신의 면면을 고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일 것이다.
짐을 앞뒤로 짊어지고 계단을 내려와 1층 프론트에 키를 반납하고 키 보증금을 받았다. 잊고 있었는데 공돈을 얻은 느낌이었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골목에서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몇 번 지나가면서 인사를 한 사이였다. 그는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도 않는 골목 한 쪽에서 옷을 걸어두고 파는 사람이었다. 만날 때마다 옷 하나 사가라고 하면 의례적으로 바라나시 떠나기 전에 사겠다고 했었는데 딱 마주친 것이다. 안산다고 지나쳐도 그만이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며칠간이었지만 매일 인사하는 사이가 아니었는가. 그래서 나는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고 거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놓은 옷들을 보는 시늉을 했다. 아저씨는 내게 옷을 걸어둔 벽 옆의 입구, 즉 자신의 집처럼 보이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차라도 주려고 하려나보다 생각하고 따라갔다. 등이 없는 어두운 통로 왼쪽으로 난 문(문짝은 없었다)에는 두꺼운 흰색 담요가 깔려있는 공간이 있었다. 들어오라는 그의 말에 슬리퍼를 벗고 들어갔다. 사방에 옷이 쌓여있었다. 푹신한 바닥에 나를 바닥에 앉히고 그는 손에 집히는 대로 내 앞에 옷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옷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대충 둘러대며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생각했다. 옷은 계속 쌓여갔다. 잠깐만, 제가 볼게요. 내 말에 아저씨는 옷을 집다가 멈췄다. 고개를 돌리다가 눈에 들어오는 옷에 시선을 고정하자마자 아저씨는 재빨리 그 라인의 옷들을 죄다 꺼내서 펼쳐놓기 시작했다. 부담을 줘서 판매하는 전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필요한 것을 사자. 나는 짐을 늘리기 싫어서 사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사기로 했다. 바로 알리바바바지였다. 그들이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은 아닐 테지만 내가 주고 싶은 선물이다. 나는 알리바바바지를 보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수많은 알리바바바지들이 티셔츠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몇 가지 괜찮아 보이는 바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것들을 집어 한 쪽에 뒀다. 잠깐 쉬자고 제안했더니 그제야 아저씨는 내게 짜이 좀 마실 테냐고 물었다. 컵을 받아들고 이야기를 나눴다. 어디에서 왔는지, 다음엔 어디로 가는지를 이야기하고 한국 사진을 보고 싶다고 해서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그때 알았다. 내 사진첩에는 한국적인 것이 별로 없었다. 커피, 유럽풍 인테리어, 술, 음식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차를 다 마신 후 본격적인 거래가 시작되었다. 너무 비싸다는 나의 주장과 이것은 네가 입은 싸구려 바지(실제로 쌌다)와 질이 다르다며 직접 재질을 비교해 보이는 아저씨의 주장에 결국 골라놓은 바지 중 몇 개를 빼놓고 사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다시 배낭에 공간을 내어 바지를 눌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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