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곳에 며칠 머물다보니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왈라라는 단어가 뒤에 붙으면 그 부분에 종사하는 직업을 뜻하는 말이 된다. 우리나라의 장이와 비슷한 느낌이다. 릭샤왈라와의 치열한 가격협상 끝에 코넛플레이스에 내렸다. 그리고 한 친구를 만났다. 그는 쪼그려 앉아서 구글맵을 열심히 보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유 자팡? , 아임 코리안. 그새 어느 정도는 거부감 없이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왜소한 몸짓에 로스팅 된 커피콩 정도의 짙은 갈색 피부를 가진 인도인 친구는 일본인 친구가 하나, 한국인 친구가 둘 있었다. 그 중 두 번째 한국인 친구는 나라고 했다. 왠지 엮이기 싫은 농도 짙은 붙임성에 난 알레그레토로 걷기 시작했고, 그는 나를 따라오며 여긴 무엇 하러 왔냐고 물었다. 데면데면하게 굴며 그냥 구경하러 왔다니까 자기가 싼 마켓을 안다고 따라오라고 했다. 덧붙여 그는 자신은 그냥 영어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좋으며, 돈을 달라고도, 뭘 사라고도 안한다고 했다. 어차피 목적 없이 구경 온 것인데 어디면 어떻겠냐는 마음에 그를 따라 나섰다. 그는 걸으며 짧은 힌디어 강의를 해줬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꺼져. 가장 쓸모 있는 세 가지 말을 전수받은 뒤 난 그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말았다. 선선한 날씨임에도 땀이 조금 나기 시작했다. 20분은 족히 걸은 것 같았고, 이미 코넛플레이스를 벗어난 지 한참이었다. 나의 힌디어 스승을 버리고 다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그를 믿고 따라갈 것인가. 고민되었다. 잠시 시간을 벌고자 그에게 담배 피우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대답에 담배를 꺼내 한 개비 물고, 한 개비는 그에게 줬다. 그는 인도에는 이런 담배 안판다고, 향이 좋다고 했다. 한국 담배를 연신 칭찬하는 그에게 이거 일본 꺼야.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한 갑에서 나온 담배를 같이 피우니 우리는 더욱 돈독해져 있었다. 그가 나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고 대답했고, 그는 취미가 크리켓이라고 했다. 힌디영화 본 게 있냐고 묻는 그에게 세 얼간이를 재밌게 봤다고 말하자, 자기도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갑자기 번뜩 떠오른 오랫동안 궁금해오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왜 인도 영화에는 중간에 꼭 음악하고 춤이 나오는 건지. 그는 대부분 인도인이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좋은 영화는 좋은 춤과 음악이 나온단다. 세 얼간이에서 춤만 추면 진저리치며 얼른 장면을 넘겼던 나의 과거가 스쳤다. 거의 다왔다는 말을 한 세 번 정도 듣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베리 빅 마켓이라던 삼 층짜리 건물을 보았다. 담배도 나눠 피우고 힌디어도 가르쳐주던 그와의 유대감이 감소했다. 그를 보자 가게 앞에 있던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제자리를 잡았다. 그렇다. 나의 입장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라고 나에게 묻는 직원의 모습이 상상되어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를 불렀다. 아까 배운 '꺼져'가 입가에 맴돌았지만 간신히 참고 원래 계획대로 코넛플레이스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정색하는 나를 보고 살짝 얼굴이 굳은 친구는 굳이 나를 배웅하겠다며 나를 안내하려 했다. 왔던 길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다른 길로 가기에 거기가 아니라 이쪽이라고 했더니 어설프게 '아 맞다.' 하는 전 친구를 보자 살짝 화가 났다. 마지막으로 담배 하나씩 나눠 피우고 '너는 네 일 해. 난 가서 혼자 구경할게.' 하고 헤어졌다. 혼자 돌아가는 길은 더욱 멀게 느껴졌다. 코넛플레이스에 드디어 돌아왔을 때, 어떤 아저씨 한 명이 다가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프렌드라고 했다. 그 이후에 하는 말은 역시 전 친구와 똑같은 멘트였다. 방금 너랑 똑같은 말 하는 친구랑 이미 갔다 왔다고 했다. 왠지 웃겼다. 나는 웃었다. 그도 웃었다.

코넛플레이스. 사람들의 경험담을 종합하면 굉장한 번화가인 듯 했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에서 그곳만 밝았다. 내가 서울에서 본 그 하늘이었다. 많은 빛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 조금 걸으니 눈앞에는 거대한 건물들이 블록별로 줄지어있었다. 소가 없었다. 바닥은 깨끗했고, 사람들의 복장조차 전혀 달랐다. 개도 없었다. 내가 아는 브랜드, 모르는 브랜드가 간판을 반짝였다. 각종 패스트푸드가게들이 있었다. 딱히 뭔가를 살 생각도, 살 필요도 없었기에 쭉 걸었다. 그러다가 익숙하고 반가운 간판을 발견했다. 입구에서는 경비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금속 탐지기 비슷한 걸 들고 입장하는 사람들을 검색했다. 커피 마시러 가는 사람들한테 저게 뭐하는 짓이지 생각이 들었다. 난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한국에 비해 저렴한 가격이었다. 나라별로 스타벅스 컵을 사 모으는 친구가 떠올랐지만 이내 잊었다. 2층의 화장실은 내 숙소보다 깨끗했다. 남은 자리가 몇 개 되지 않아서 나는 서양 부부가 마주앉은 자리 옆에 앉았다. 교수라는 할아버지와 간단한 대화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너무 빠르게 진행된 현지화 탓에 나는 이곳에서 가장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직원이 부르는 주문서에 적은 내 닉네임을 듣고 커피를 받아왔다. 영수증을 보며 가계부 역할을 하는 메모장에 가격을 적었다. 오렌지 10킬로 가격이 넘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빠하르간지에서는 1킬로그램에 30루피 달라는 오렌지를 20루피로 깎았고, 방금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온당히 계산서 그대로를 지불했다. 물론 여기에 정해진 가격을 가지고 깎는 것이 상식 밖의 일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오렌지 가격을 깎고 나서 더 깎았어도 됐을까 하고 아쉬워했던 내가 계속 떠올랐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걸까. 소가 없어서? 거리가 깨끗해서? 탐지기가 있어서? 인식하지 못했던 내가 가진 타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느끼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부끄러움과는 조금 다르고 실망감과는 조금 비슷한 그런 감정이었다. 난 그것의 정체에 대해 자세히 알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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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어릴 적 좁은 시장골목에서 엄마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긴장했던 때가 떠올랐다. 크고 작은 조각들을 파는 할아버지, 다양한 브랜드의 옷을 걸어두고 파는 아저씨, 길을 돌아다니며 악기를 파는 청년, 옆을 수시로 지나는 릭샤왈라들이 말을 걸어왔다. 숙소 앞 로터리를 중심으로 조금씩 범위를 늘려 왔다가 갔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오리엔탈리즘에 심취한 듯 수행자인양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거적을 두른 금발의 청년이 지나가는가 하면, 네댓 명의 어린 남자들이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며 내 옆을 지나치기도 했다. 그렇게 목적 없이 걷다가 문득 왜 이곳에 왔는지 명확히 하고 싶어졌다. 기억을 더듬어봤다. 가장 처음 인도에 가겠다고 생각한 것은 7년 전이었다. 그러니까 스물 둘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계기는 생각이 나지 않으나 그때의 기분은 기억이 났다. 배를 타면 무조건 비행기보다 돈이 덜 들것이라 생각했고, 수첩에 계획을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셀 수 없이 많은 바람들 중 하나의 씨앗이 심어졌다. 갑자기 툭 하고 싹이 트인 인도 여행. 그 계기는 그럴듯했다. 시험에서의 낙방. 수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떨어졌고, 떨어지는 중이다. 나는 시험에서의 실패에 대해 그들과 다른 대처를 하고 싶었다. 난 소수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 나의 선택, 내가 속한 집단, 나의 취향이 소수임을 확인할 때 내 희귀함이 인정받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문득 떠오른 오래전의 바람. 머리 보다는 가슴이 시키기는 했으나, 가슴 깊숙이에서 우러나온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언제나 그랬듯 결정은 한 순간이었고, 열흘 후에 나는 배가 아닌 비행기로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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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을 켰다. 갑작스러운 밝음에 눈을 꼭 감고 주변을 손으로 훑었다. 손에 익숙한 것이 부딪혔다. 눈을 가늘게 떴다. 일곱 시다. 딱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불을 껐다. 다시 누웠다. 수면을 시간낭비라고 여기는 나에게 다시 잠을 청하기란 괴로운 일이었다. 돌아누워서 카페 검색을 했다. 검색어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빠하르간지 식당, 빠간 식당, 빠하르간지 맛집, 여러 가지 조합들을 입력해서 글들을 탐독했다. 문이 닫혀있을 수도 있다는 불안에 식당후보를 두 개 정해서 가는 길을 숙지했다. 아직 식당이 열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에 빠하르간지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빠하르간지. 여행자의 거리라고 불리는 듯하다. 롤플레잉 게임에서 캐릭터가 처음 생성되는 장소랄까. 나에게는 초보존이나 스타팅 포인트 같은 이미지다. 델리에서 출발하는 대다수의 여행자들은 뉴델리역이 가까운 이곳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현지 유심카드에서부터 침낭 등 필요한 여러 가지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사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유의사항은 거의 모든 글들에 있었다. 오늘 할 일을 메모장에 적기 시작했다.

1. 유심 만들기 2. 적응하기

더 이상 쓸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둘 다 꼭 해야 할 일이기는 했다. 어물쩍 시간이 지나갔다. 두 달 전 지금쯤이면 독서실 옥상에서 두 번째 담배를 피우고 있을 시간인가. 담배를 꺼냈다. 처음 사본 면세 담배다. 지금쯤 한국은 담뱃값이 올랐겠구나. 귀국할 때 사갈 면세 담배를 마지막으로 금연을 시작해볼까 생각해본다. 화장실 변기에 앉는다. 고요한 중에 라이터를 켜고 불을 들이킨다. 작은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올라간다. 식당 좌표를 되새겨본다.

가슴까지 복대를 치켜 올리고 방문을 자물쇠로 잠금을 시작으로 인도의 첫 나들이가 시작되었다. 무언가 물을 끓이는 사람, 가게 문을 여는 사람들, 어젯밤에도 뛰어놀았을 뛰어노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좁은 골목의 끝에는 물을 샀던 튀김 빵집이 첫 튀김 빵을 건지고 있었다. 구면이라 그런지 괜히 인사라도 해볼까 싶었다. 물론 하지는 못했다. 어제는 몰랐다. 큰 길은 로터리라고 해야 할까. 그것과 비슷한 구조의 길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큰 길은 아니었다. 왕복 1.5차선 정도의 길이었으니까. 믹서 옆에 당근처럼 보이는 것들을 쌓아두고 있는 가게도 보였다. 아마 저게 진짜 생과일주스를 판다는, 게다가 저렴하다는 과일주스 가게인가보다. 하도 두리번거리며 걸었더니 뜨내기처럼 보였나보다. 2미터에 한 명씩 영어로, 한국말로 어디서 왔냐, 안녕하냐는 등의 말을 걸어왔다. 의연한 척 하고 싶었던 나는 대답은 하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첫 번째 식당 앞에 도착했다. 옥상에 위치한 식당이었다. 1층은 여행사 같았다. 다행히 아직 열지는 않아서 호객행위 없이 무사히 올라갈 수 있었다. 뭐랄까. 이국적이었다. 당연한가. 지붕을 경계로 테이블이 달랐다. 한 바퀴 둘러본 후 혼자 먹기 좋은 지붕 바깥 쪽 테이블에 앉으려 의자를 뺐다. 그리고 다시 넣었다. 의자가 젖어있었다. 지붕 안쪽의 한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두고 직원이 건네는 메뉴판을 받았다. 아침메뉴가 있었다. “디스원 플리즈.” 수능 시험을 마지막으로 영어를 쓸 일이 없었지만 이런 표현이 몹시 유려하게 나오는 내가 대견했다. 선불인지 후불인지 몰라 지폐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먼저 낸다고 싫어하지는 않을 테니 돈을 내밀었다. 직원이 거스름돈을 셈하는 동안 뒤쪽에서 아주 반가운 글을 발견했다. wifi난 곧바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가장 먼저 커피가 나왔다. 녹색 컵받침에 찻숟가락까지 갖춰있었다. 테이블에 놓여있는 설탕을 조금 넣은 후 저어 마셔봤다. 커피보다는 커피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좀 더 어울리는 그런 맛이었다. 이어서 하나의 접시와 하나의 컵이 왔다. 컵에는 오렌지주스, 접시에는 식사가 담겨있었다. 빵 한 조각과 감자볶음처럼 보이는 붉은색 한 무더기, 달걀프라이 두 개, 흰색부터 녹색까지 그러데이션을 이루는 마치 애호박을 잘라놓은 듯 한 무언가가 몇 조각 놓여있었다. 메뉴판을 다시 들여다봤다. 오렌지주스, 야채볶음, , 달걀, 아보카도였다. 이것이 아보카도구나. 몇 년 전, 호기롭게 마트에서 두리안을 사다가 쪼개서 한 입도 먹어보지 못한 채 버린 이후로 새로운 과일에는 도전을 하지 않던 나였다. 포크로 아보카도를 찍었다. 찍혔지만 올라오지 않았다. 익혀서 그런 건지 원래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보카도는 찍는 것이 아니라 떠서 먹는 게 바른 방법인 듯 했다. 살짝 한 조각 떠서 입에 넣었다. 달지도 짜지도 않았다. 약간의 향과 눅진한 식감만이 있었다. 아무래도 난 열대과일과는 인연이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왼손엔 빵을, 오른손엔 포크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무리 없이 식사를 마친 후 바깥 구경을 했다. 그렇게 긴장하고 걸었던 거리가 한눈에 보였다. 탁한 색 공기와 무채색의 건물들을 배경으로 노란색과 초록색의 오토릭샤와 택시들이 여름날의 매미처럼 경적을 울려대며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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