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르질링에는 기차역이 없다. 그래서 표를 위탁으로 예매해야 했다. 다음 목적지는 카마수트라로 유명한 카주라호. 기차표를 알아보던 직원은 바로 가는 방법은 없고, 바라나시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로 결정을 하고 돈을 지불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틈만 나면 점유하던 벤치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칸첸중가를 다시 눈에 담았다. 생전 처음 마주한 거대한 자연과도 곧 이별이었다. 내 팔뚝에 헤나를 보고 여자냐고 놀리던 아이와 함께 과자도 먹었다. 어느새 이곳에서 걷다가 앉다가 하면서 별일 없이 지내는 것이 익숙해졌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초우라스타 광장 주변에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다르질링에 와서 신기하다고 느낀 것 중 하나가 지나가는 곳곳에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아이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여기는 이런 게 유행하는가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햇빛이 조금 누그러들 때쯤 여러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왔다. 광장에는 앰프가 설치됐고, 무대 맞은편 단상에는 테이블과 의자 다섯 개가 놓였다. 나는 사람들 틈에 함께 서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를 구경했다. 내 옆에서 무대를 주목하던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춤 경연대회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곧 경연대회가 시작됐다.

익숙한 팝송과 낯선 인도 음악들이 앰프를 통해 쿵쿵 울렸고, 참가자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영상촬영을 하는 카메라도 등장했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들이 앉아있는 모양이 우리나라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았다. 광장의 모든 사람들은 무대에 집중했다. 응원을 하고, 함께 몸을 들썩이기도 했다. 소품을 이용해 이야기가 있는 공연을 펼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연기를 하기도 했다.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할 때쯤 모든 경연을 끝났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는지 자동차를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경연이 끝나자 이내 다시 조용한 마을로 돌아왔다. 예매한 표를 받기로 한 시간이 되어서 바라나시로 가는 표 한 장,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로 가는 표 한 장을 받아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지사제를 사왔다. 나는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나을 줄 알았던 설사는 멎을 줄을 몰랐다. 하루 세 끼를 숨 쉬는 것처럼 지키던 내가 거의 열흘 가까이를 한 끼나 두 끼만 먹었더니 식욕이 그리웠다. 숙소에 오자마자 약을 한 알 삼키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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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사람이세요? 아직 안개가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초우라스타 광장에서 각자의 일과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고개를 돌렸더니 우리나라말을 하는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스미마셍, 이라고 모른 채 할까 하다가 나도 우리말로 답했다. 친화력을 수치로 따졌을 때, 내가 1이라면 그는 3정도 돼보였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서로 프라이버시를 존중했다. 개인적인 것은 묻지 않으며 여행 경로와 다녀온 곳 중에 어떤 곳이 좋았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나와 비슷한 경로로 다르질링에 왔으며, 무려 5일간 이곳에 있을 예정이었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고 아침식사로 그는 야채, 나는 고기만두를 먹으면서 함께 차밭을 보러 가기로 결의했다.

약간의 정비 후에 우리는 약속된 시간에 광장에서 만났다. 그가 가져온 가이드북에는 여러 체험을 할 수 있는 차밭들이 소개되어있었다. 하지만 경비의 최소화를 위해 직접 아무 차밭이나 가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아래쪽에 위치한 녹색 밭이었다. 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와 바위를 이용해 간이로 만든 계단 등을 내려갔다. 길을 가로지를 수 없기에 골목골목을 따라서 걸었다. 마당도 구경하고 가축도 구경했다. 많은 생활들을 마주쳤다. 어느 집 마당을 지날 때였다. 다섯 명의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꼬마들은 마당에서 뭔가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내가 치즈. 하고서 사진을 찍자 아이들이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어주었다.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차밭 가는 길을 물었다. 그렇게 꽤나 걷다보니 차밭이 나왔다. 지금은 1. 겨울이었다. 수확이 끝나고, 가지가 잘렸을 앙상한 갈색 밑동만이 보였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갔다. 아래쪽에는 초록색 밭이 보였기 때문이다. 수확 후에 잘라낸 것일까. 볼품없는 초록 나무들이 주욱 도열한 곳에 도착했다. 당최 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없지만 차나무 밭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그 곳에서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약간 허무함을 느꼈다. 동행했던 친구도 몇 장 사진을 찍더니 돌아갈 길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눈치였다.

올라오는 길은 역시 힘들었다. 우리는 무언의 경쟁심으로 쉼 없이 묵묵히 오르막을 걸어 올라갔다. 역시 고도가 높아 공기가 선선했다. 역시 하늘과 가까워 햇빛은 강렬했다. 땀을 식히고자 겹쳐 입었던 옷들을 하나하나 벗었다. 누구의 승리도 없이 무언의 경기를 마친 우리는 최대한 숨을 고르며 시내에 들어섰다. 식당에서 피자를 먹었다. 여전히 대화는 적었지만 친근함은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서로의 남은 여행에 행운을 빌어주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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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추웠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추웠다. 침낭에서 손을 꺼내 이불을 걷었다. 번데기가 탈피하듯 침낭의 지퍼를 내려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패딩 때문에 몸이 둔했다. 엉덩이를 이용해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침대 밖으로 발을 겨우 디뎠다. 바닥에는 싸구려 카펫이 깔려있었다. 나무로 된 창문을 열어보니 바깥 풍경이 보였다. 모처럼만에 괜찮은 풍경이 보였다. 언덕 아래 낮은 집들의 옥상과 안개가 그야말로 자연스러웠다. 돈 좀 쓴 보람이 있었다. 발품을 꽤나 팔았음에도 빈 객실이 없거나 비싸다는 이유로 언덕을 조금씩 올라와 광장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다. 그래봐야 만 원 정도밖에 안하지만 그동안 지냈던 숙소들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가격이다. 방은 깔끔했고 심지어 텔레비전도 있었다. 밤새 텁텁해진 입안을 양치로 정화시키고 본격적으로 씻기 위해 카운터로 갔다. 왜 카운터로 갔느냐고?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하면 십 분 정도 후에 양동이로 가져다주는 시스템이다. 보통의 경우에 비싸다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싸다는 것은 불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기꺼이 숙박비를 줄이기 위해 제한된 뜨거운 물을 십 분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생각해보면 프랜차이즈 커피 한 잔 마실 돈이면 훨씬 편해질 수 있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화장실의 요상한 구조상 변기가 그 방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아직도 수분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는 대장 덕에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려야 했다. 화장실에 쪼그려 앉을 때면 뭔가 굉장히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높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변기 옆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왔다. 굉장히 차가운 물이었다. 대야에 직원이 가져다준 양동이의 물과 찬물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머리도 얼굴도 발도 씻었다. 남은 물로는 빨래도 했다.

숙소 등급이 한 단계 정도 오르기는 했지만 아직 조식을 제공받는 수준은 아니었다. 운동화를 신었다. 그것으로 외출 준비는 끝이었다. 가방을 메고 찬찬히 언덕을 내려왔다. 동네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인사를 했다. 안녕 바부.

아침은 길거리에서 파는 모모를 먹었다. 만두다. 고기모모와 야채모모가 있었다. 우리나라와 똑같았다. 약간 향이 다른 것 외에는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새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간단한 표시로 고기가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과자에도 표시가 되어 있다. 초록색 동그라미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고, 빨간색 동그라미는 고기가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생수를 사러 가게에 들렀다가 초록색 동그라미가 있는 라면도 하나 샀다. 그리고는 부셔서 스프를 뿌렸다. 생라면을 집어먹으며 초우라스타광장 벤치에서 햇빛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 산책로를 걸었다. 노점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옷을 걸어두고 있었다. 나는 관심 있는 척 옷들을 구경하면서 떠나는 날 사겠노라며 아주 천천히 이동했다. 벤치에 앉았다가 누웠다가 노래도 들었다가 따라 부르기도 하니 안개가 걷히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더 이상 꼭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무감은 없었다.

산책로는 언덕을 빙 둘러 한 바퀴를 도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피부병에 걸린 개들과 각종 동물들의 배설물들이 부비트랩처럼 널려있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길은 깨끗했고 돌아다니는 개들도 멀쩡했다. 한가롭게 하품을 하며 누워있던 강아지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고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

마음의 소리가 아니었다.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감탄사가! 나에게선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행동이다. 내 시선 끝에는 허공에, 그러니까 파란 하늘에 구름처럼 걸려있는 설산이 있었다. 안경을 벗어 티셔츠로 문질러 닦아 다시 썼다. 신기루도 아니고, 구름도 아니다. 파라마운트 배급 영화가 스크린에 걸린 듯 내 눈 앞에 눈 덮인 산이 걸려있었다. 멀리 있었기에 크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원근을 초월하는 크기의 그 존재에 압도되었다. 갑자기 마주친 산은 나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경외감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철저하게 이성적이라고 생각해왔던 내게서 애니미즘을 발견했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마구 찍었다. 확대해서도 찍어보고 온갖 설정들을 바꿔 찍어보았지만 담기지 않았다. 형태는 찍혔지만 내가 본 그 느낌은 담기지 않았다. 처음으로 있지도 않은 고급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나는 서둘러 산책로를 따라 이리 저리 자리를 옮기다가 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 칸첸중가가 내 앞에 있었다. 그렇게 벅차오른 상태로 나는 몇 시간동안 앉아서 계속 산을 바라봤다. 절경, 비경, 그림 같은 따위의 어떤 형용사로도 형용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를 이곳에 끌어들인 것은 홍차도 뭣도 아닌 칸첸중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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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뉴잘페구리에서 실리구리까지, 다시 실리구리에서 다르질링까지 가는 지프를 탔다. 이동거리가 꽤 긴 편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지프를 추천했다. 역 앞에서는 지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일단 빈 지프에 타고, 모든 자리에 사람이 채워지면 출발하는 방식이었다. 역시 가격 협상을 한 후에 지프에 올랐다. 내 배낭을 포함한 사람들의 짐은 모두 지프의 천장에 묶였다. 실리구리까지는 일반적인 도심을 지나고 평지를 이동했다. 실리구리에서 출발한 지프는 산속 도로를 오르면서 마을이 나타나면 사람들을 태웠고, 다른 마을이 나타나면 사람들을 내렸다. 그 인원도 제각각이어서 바닥에 앉는 사람이 생길 때도 있었다. 나는 앞좌석에 탔기 때문에 자리가 고정되어 있어 자리를 좁힌다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바닥의 요철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다이내믹한 승차감에 머리를 조심해야했다. 분명 계속 올라가고 있는데 길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져있었다. 이렇게 올라가도 되나 싶을 때쯤 지프가 멈춰 섰다. 이곳이 다르질링인가 하고서 내렸는데 잠깐 쉬었다가 올라간다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군것질거리를 사고 마실 것을 마셨다. 나에게도 권했지만 나는 내 배를 가리키며 얼굴을 찌푸리는 것으로 나의 상태를 설명하며 거절했다. 주변을 돌아봤다. 아래쪽 끝도 위쪽 끝도 보이지 않았다. 속을 한 번 비우고 갈까 싶어 화장실을 물어봤다. 벽과 천장만 있던 화장실에선 어떤 아저씨가 큰일을 치루고 계셨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와 지프에 앉았다.

다르질링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열차 레일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식 열차가 다니는 것은 아니고, 별칭 토이트레인인 작은 열차가 다니는 길이다. 토이트레인은 무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속도가 매우 느리고 매연이 엄청난데다가 비싸기까지 하다는 이야기에 타보진 않고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올라가는 길에 만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지만 볼 수는 없었다.

레일을 지나치고도 한참을 더 올라갔다. 이미 몇 개의 마을을 지나쳤기 때문에 새로운 마을이 나와도 혹시 이곳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창밖 풍경을 보다가 반가운 광고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높은 곳에 무려 캔터키프라이드치킨이라니. 꼭 먹어 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지프 밖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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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도 기차 좌석에는 여러 등급이 있다. 땅이 워낙 넓다보니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침대칸을 이용한다(고 한다). 델리에서 바라나시까지는 2AC, 무갈사라이에서 뉴잘페구리까지는 3AC를 탔다. AC는 에어컨, 앞의 숫자는 몇 층 침대인가를 나타낸다. 당연히 2AC보다 3AC가 저렴했다. 그보다 저렴한 좌석은 SL클래스가 있다. 슬리퍼칸이라고 부르는 SL클래스는 3층 침대에 천장에는 선풍기가 달려있다고 한다. 요즘은 날씨가 더운 편이 아니라 에어컨과 선풍기를 켤 필요가 없기에 SL칸 표를 끊을까 했다. 하지만 저렴한 대신 도난위험이 있다는 글들을 보고 나는 3AC좌석을 택했다. 나는 예약한 3층에 자리를 잡았다. 누워있는 것 외에는 다른 자세를 취할 수 없었다. 열 두 시간 내내 잘 수는 없었기에 미리 휴대폰에 담아온 소설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을 거르니 배가 고팠다. 점심때 쯤 식사를 주문받는 승무원에게 식사를 주문했다. 도시락을 받아들고 나니 정상적으로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1층에는 인도인 가족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 같이 좀 먹읍시다.’ 하고 싶었지만 장소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런 너스레가 갑자기 나오지는 않았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허리를 60도쯤 굽히고 힘겹게 도시락을 먹고 물을 넉넉히 마셨다. 식사를 마친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그동안 한껏 민감해진 장에 채웠으면 비워야한다는 자연의 섭리가 빠르게 찾아왔다. 사실 마음 깊은 곳으로 언젠가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번뇌 끝에 마음을 굳게 먹고 물티슈를 주머니에 챙겨서 1층으로 내려왔다. 허리에 뻐근함이 느껴졌다. 슬쩍 스트레칭을 하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 나를 괄약근에 더욱 집중하도록 했다. 화장실 문을 마주하니 두려웠다. 문에는 정차 중에는 사용하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했다. 문을 여니 예상했던 농후한 암모니아향이 코를 괴롭혔다. 좁은 공간엔 은색으로 반짝이는 스테인리스로 된 재래식 변기가 있었다. 어느 방향을 보고 앉아야 할지 걱정할 필요 가 없도록 친절하게 발을 올려두어야 할 부분에 표시도 되어 있었다. 조준점 부분에는 구멍이 있었다. 그렇다. 구멍. 그 구멍을 통해 레일이 빠르게 지나는 것이 보였다. 문 앞에 적혀있던 정차 중에 사용하지 말라는 문구가 자연스레 납득되었다. 한껏 영역표시를 하던 중에 적절한 높이, 그러니까 앉아서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곳에 위치한 수도꼭지를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그 용도가 짐작되었다. 물론 현지의 관습을 존중하지만, 어떤 손을 사용해야 하는지 여전히 몰랐던 나는 물티슈를 사용했다. 내 안의 모든 것을 비운 후 혹시 바닥에 넘어질까 싶어 조심스레 복장을 단정히 했다. 이제 내게 남은 과업은 다음 사람을 위해 처참한 분출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변기의 스테인리스는 벽까지 이어져있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이어진 그곳에는 밸브가 있었다. 밸브를 열었다. 츄슉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흘러내렸다. 인도에서의 열차 화장실 첫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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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오토릭샤. 많은 사람들이 툭툭이라고 부르는 이 탈것은 바퀴가 세 개다. 운전석은 앞에, 손님이 탈 수 있는 공간은 뒤쪽에 위치해 있으며, 그 뒤에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대부분의 툭툭은 인도를 상징하는 노랑, 초록색이 적당히 배치되어 있다. 물론 라이트며, 사이드 미러 등 있을 건 거의다 있다. 다만 문짝이 없다. 대략 24킬로미터를 툭툭으로 이동하는 길은 익사이팅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경적은 급박한 상황에서 눌려지지만 인도의 차에서는 쉴 새 없이 울린다. 문짝이 없었기에 사방에서 울리는 경적소리와 뿜어져 나오는 매연, 밤이라고 나아지지 않았을 스모그 그 자체인 공기, 공기저항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릭샤왈라가 처음에 제안한 750루피를 450루피까지 깎았을 때의 뿌듯함은 이미 사라졌다. 타는 내내 혹여나 배낭이 밖으로 떨어질까 봐 짐칸에 고정시킨 후 한 쪽 팔을 걸어두고 긴장하고 있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다리를 건너고 한적한 도로를 지나다가 릭샤왈라가 갑자기 툭툭을 세웠다. 그는 조금 긴장하고 있는 내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약간의 돈을 들고 가서 자신의 신에게 간단한 의식을 하고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출발했고, 나는 그 사이에 얇은 패딩을 입고 마스크도 착용했다. 처음 가보는 길인데다가 긴장을 해서 그런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작은 상가들이 몰려 있는 거리를 지나 마침내 무갈사라이역에 도착했다. 나는 우선 그에게 약속한 돈을 지불했다. 또 그 어둠과 바람을 헤치고 나를 안전하게 이곳까지 데려다 준 수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뭔가를 주고 싶어서 커피믹스를 선물했다.

역 안 전광판은 열차가 세 시간 연착됐음을 알리고 있었다. 새벽 3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너무 늦은 시간엔 툭툭을 타고 갈 수 없을까봐 여섯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연착이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담요를 가져와서 덮고 느긋하게 앉아있거나 누워있었다. 나도 자리를 잡았다. 적당한 벽에 배낭을 세워두고 바닥에 종이를 깔았다. 등을 기댔다. 자다 깨다를 몇 번 반복하면서 인도 열차 앱으로 지금 기차가 어디쯤에 있는지 수시로 체크했다. 그러던 중에 어떤 할아버지가 내 앞으로 왔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지 계속해서 힌디어로 나에게 표를 보여주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많은 인도인들이 있는데 왜 하필 나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하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힌디어는 안녕하세요, 꺼져, 감사합니다. 세 개 뿐이었다. 수 분간의 교감 끝에 나는 노인의 의중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실시간으로 열차 시간을 확인하는 나를 보고 자신의 기차가 언제 도착하는지가 알고 싶었다. 나는 기차표에 적힌 열차 번호를 입력하고 언제 도착하는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어디서 타야 하는지 숫자와 그림을 종이에 적어가며 설명해줬다. 여위고 주름진 검은손으로 종이를 받아들며 할아버지는 내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외국에서조차 고맙다는 말에 어떻게 대처해야할 줄 몰랐다. 일어나 고개를 함께 숙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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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후에 급작스럽게 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인도에 체류할 수 있는 날은 최대 30일이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디서 며칠을 보낼 건지 정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느껴졌었다. 좋으면 더 묵고 싫으면 빨리 떠나자. 라는 생각으로 인도 지도를 프린트해서 가고 싶은 곳들을 표시했다. 그러고 나니 대부분이 북인도 지방이어서 남인도를 제외한 북쪽의 도시들 중 동선 상으로 갈 수 있는 곳들만 연결해서 대략적인 루트가 정해졌다.

다음 목적지는 다르질링이었다. 홍차의 이름인줄로만 알았던 그것이 찻잎이 나오는 지역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인도 여행을 결정하고 난 이후였다. ‘뜨거운 액체를 먹는 것은 국과 찌개정도면 충분하다.’ 는 평소의 지론대로 따뜻한 차를 멀리해온 내게는 무려 세계 3대 홍차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 다르질링의 차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단지 히말라야산맥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나를 끌어당겼다. 날씨가 좋을 때는 칸첸중가라는 산이 보인다고 했다. 산을 좋아하는 것도, 평소 히말라야에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르질링에 가는 최선의 방법을 얻기 위해 거듭된 검색을 마친 끝에 결국 바라나시에서 바로 가는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은 바라나시에서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무갈사라이역으로 가야했다. 오토릭샤를 타고 바라나시역으로 가서 다음날 저녁 기차표를 예매했다. 밤에 타는 기차는 이동과 숙소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받아든 표에서는 12시간에 조금 못 미치는 이동시간이 적혀있었다. 돌아와서는 바라나시의 마지막 날을 즐기기 위해 더욱 영역을 넓혀서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어둑해져 문 닫을 시간이 되자 과일을 떨이로 파는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흥정을 거쳐서 석류와 바나나를 샀다.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몇 가지 과자와 음료수를 샀다. 침대에 엎어져서 과일과 과자를 먹으며 일기를 썼다. 이 평화로운 느낌을 최대한 오래 기억해두고 싶었다.

체크아웃시간이 11시였기에 잠에서 깨자마자 짐을 챙겼다. 내가 가져간 가방은 두 개였다. 친구에게 빌린 등산용 가방과 지갑이나 수첩 등 간편한 짐만 넣어 메고 돌아다닐 수 있는 작은 백팩 하나다. 대충 손빨래로 빨아 말려둔 속옷도 챙기고 친구의 부탁으로 돌아다닐 때마다 산 엽서들도 가방 한편에 넣었다. 가져간 얇은 패딩의 부피를 최대한 줄여보려 이렇게 저렇게 접어 보다가 돌돌 말아 꾹 눌러 공기가 빠졌을 때 여분의 공간에 쑤셔 넣는 것으로 짐정리를 마쳤다. 귀중품들(이래봤자 여권과 나름 고액권의 루피와 달러)을 복대지갑에 넣고 티셔츠 안쪽에 버클을 채우는 것으로 나갈 채비도 완료했다. 아직 열차시간까지는 열두 시간도 더 남았다. 연착될 것을 생각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벌써부터 기차표를 지갑에 고이 접어서 넣으면서 너무 준비에 대한 강박이 심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한데. 그러고 보면 여행은 그런 것 같다. 익숙한 습관과 관습으로 인해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무지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새로운 환경에서 발견한 자신의 면면을 고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일 것이다.

짐을 앞뒤로 짊어지고 계단을 내려와 1층 프론트에 키를 반납하고 키 보증금을 받았다. 잊고 있었는데 공돈을 얻은 느낌이었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골목에서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몇 번 지나가면서 인사를 한 사이였다. 그는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도 않는 골목 한 쪽에서 옷을 걸어두고 파는 사람이었다. 만날 때마다 옷 하나 사가라고 하면 의례적으로 바라나시 떠나기 전에 사겠다고 했었는데 딱 마주친 것이다. 안산다고 지나쳐도 그만이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며칠간이었지만 매일 인사하는 사이가 아니었는가. 그래서 나는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고 거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놓은 옷들을 보는 시늉을 했다. 아저씨는 내게 옷을 걸어둔 벽 옆의 입구, 즉 자신의 집처럼 보이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차라도 주려고 하려나보다 생각하고 따라갔다. 등이 없는 어두운 통로 왼쪽으로 난 문(문짝은 없었다)에는 두꺼운 흰색 담요가 깔려있는 공간이 있었다. 들어오라는 그의 말에 슬리퍼를 벗고 들어갔다. 사방에 옷이 쌓여있었다. 푹신한 바닥에 나를 바닥에 앉히고 그는 손에 집히는 대로 내 앞에 옷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옷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대충 둘러대며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생각했다. 옷은 계속 쌓여갔다. 잠깐만, 제가 볼게요. 내 말에 아저씨는 옷을 집다가 멈췄다. 고개를 돌리다가 눈에 들어오는 옷에 시선을 고정하자마자 아저씨는 재빨리 그 라인의 옷들을 죄다 꺼내서 펼쳐놓기 시작했다. 부담을 줘서 판매하는 전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필요한 것을 사자. 나는 짐을 늘리기 싫어서 사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사기로 했다. 바로 알리바바바지였다. 그들이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은 아닐 테지만 내가 주고 싶은 선물이다. 나는 알리바바바지를 보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수많은 알리바바바지들이 티셔츠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몇 가지 괜찮아 보이는 바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것들을 집어 한 쪽에 뒀다. 잠깐 쉬자고 제안했더니 그제야 아저씨는 내게 짜이 좀 마실 테냐고 물었다. 컵을 받아들고 이야기를 나눴다. 어디에서 왔는지, 다음엔 어디로 가는지를 이야기하고 한국 사진을 보고 싶다고 해서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그때 알았다. 내 사진첩에는 한국적인 것이 별로 없었다. 커피, 유럽풍 인테리어, , 음식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차를 다 마신 후 본격적인 거래가 시작되었다. 너무 비싸다는 나의 주장과 이것은 네가 입은 싸구려 바지(실제로 쌌다)와 질이 다르다며 직접 재질을 비교해 보이는 아저씨의 주장에 결국 골라놓은 바지 중 몇 개를 빼놓고 사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다시 배낭에 공간을 내어 바지를 눌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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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도인들은 갠지스강을 강가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나는 강가강가에 앉아 바라나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루가 길었다. 은근히 기대했던 깨달음은 오지 않았다. 대신 온갖 상인들이 왔다. 짜이 소년이 와서 한 잔 따라주면 마셨고, 엽서를 파는 소녀가 와서 종류별로 펼쳐놓기 시작하면 하는 수 없이 한두 장 샀다. 여느 때처럼 햇빛을 피해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요가매트 또는 천을 깔아두고 엎어져서 마사지를 받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어떤 남자가 다가와 마사지 한 번 할 테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시원했다. 그것도 몹시. 저 강력한 악력으로 수년간 꾸준하게 뭉쳐온 내 어깨를 풀어주면 얼마나 좋을까를 잠시 생각했지만 정신을 다잡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 진짜 나 돈 없어, 라고 말하자 그는 돈을 받지 않겠다며 나를 매트 앞으로 인도했다. 엄청난 내적 갈등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난 이미 신발을 벗고 매트 위로 올라가있었다. 남자는 내 발을 두 손으로 움켜잡더니 힘을 주었다. 부끄러움, 시원함과 원인을 모르는 미안함 등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되기 시작했다. 더러운 내 발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잡고 이렇게나 시원하게 마사지를 해주다니... 혹시 이 사람은 천사인가. 하는 생각과 결국 난 돈을 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끊임없이 싸웠다. 그가 온 힘을 다해 팔꿈치로 등 여기저기를 누를 때쯤 나는 그가 받지 않는다고 거절한대도 돈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나와 요가매트는 물아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마사지가 끝났음을 알렸다. 나는 옷을 추스르며 진심을 담아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3천루피를 요구했다. 찰나의 시간에 감사함이 분노로 바뀌었다. 공짜라고 했잖아, 라고 말하는 나와 풀 마사지를 받았으니 돈을 내놔라. 라고 하는 그와의 실랑이는 결국 300루피로 합의를 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마음속으로는 분한 마음이 남았지만 온 몸에는 시원함이 남아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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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헤나를 했다. 간판에는 서툰 한글로 미나헤나샵이라고 쓰여 있었다. 헤나샵 주인은 자기 이름이 미나라고 했다. 미나 누나는 다양한 무늬들이 있는 디자인리스트를 보여주며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골라보라고 했다. 내가 사진을 넘기는 동안 그녀는 자부심 가득한 눈빛과 말투로 자신이 직접 고안한 무늬라는 것을 강조했다. 적당한 사진을 택했다. 약간의 준비를 마친 후, 내 손등 위의 조그만 튜브 끝에서는 진한 갈색의 액체보다 고체에 가까운 끈적끈적한 것이 나왔다. 미나 누나가 능숙한 솜씨로 내 손등 위에 튜브를 짜기 시작했다. 처음에 해바라긴가 했던 문양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내 그녀는 프리스타일로 손등에 그림을 얹었다. 파스를 바른 듯 시원해졌다. 그녀는 작업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요컨대 이 구역의 원조 헤나샵은 자기이며, 자신의 헤나에 대해 많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내 경험은 아니었지만 카페에서 자주 본 빠하르간지의 헤나 사기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물가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어리바리한 초짜 여행객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장사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네일샵에서 그녀들이 왜 그렇게 수다를 떠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손등 위에 갯지렁이 똥처럼 얹어진 헤나가 어느 정도 마르기를 기다릴 때쯤, 머리에 붕대를 감은 꼬맹이가 들어왔다. 꼬맹이가 나에게 나마스테라고 하기에 나도 나마스테라고 했다. 미나 누나의 아들이라고 했다. '바부'라고 부르기에, 안타까운 이름이구나 생각했다. 바부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몇 마디 나누고 재빠르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마 하교 후 나가서 놀러 나가는 게 아닌가 생각됐다. 이어서 미나 누나가 이야기하길 자신은 1, 3학년 아들, 딸을 두고 있다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 까지는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자식 이야기를 하는 그 눈에서 행복이 보였다. 갑자기 뭔가 선물을 주고 싶었다. 가방에서 빨간색, 파란색 볼펜을 꺼내서 '바부'에게 주라고 했다. 몹시 기뻐하던 미나 누나는 바부는 그냥 인도에서 꼬맹이들한테 부르는 스윗네임이라고 알려줬다. 하나도 스윗하지 않지만 좋은걸 알았다. 지나가는 꼬맹이한테 바부라고 해야지.

미나 누나가 건넨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남긴 방명록 한 쪽에 짧게 글도 남겼다. 특히 방명록을 넘기면서 이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인데, 라며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그녀는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미나 누나는 새 명함을 만들어야 된다며 한글로 미나 헤나샵이라고 종이에 써달라고 했다. 내 주변에 소문난 악필인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미안한 제안이었다. 곧 나는 펜을 들고 공들여 글씨를 썼다. 판본체로. 여기랑 여기는 붙여서 쓰는 것이냐, 이건 동그랗게 쓰는 것이냐, 묻는 그녀의 말에 자세하게 한글을 지도해주었다. 고맙다며 서비스로 오른손 손바닥에 럭키워드라며 ''을 써줬다. 시바신의 어쩌고 하던데 못 알아들었다. 머리 아플 때 조용한 방에서 앉아서 손을 모으고 '~'하고서 미간에 집중하면 두통도 낫는다고 했다. 혹시 아랫배에 집중하면 설사도 낫는지 묻고 싶었다. 갯지렁이 똥이 완전히 굳으면 두 시간 정도 지나서 툭툭 털어내라는 처방을 받고 미나 헤나샵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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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느낌이 좋지 않았다. 평소의 퐁당퐁당이 아닌 폭포수소리가 났다. 사실 변기에 앉기 전부터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내 몸은 내가 잘 아니까. 생각하는 사람처럼 무릎에 팔꿈치를 괸 채로 눈을 감았다. 아랫배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잉태된 느낌이었다. 이 묽은 변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렸다가 용의선상에서 점차 줄어들며 한 가지로 확신이 들었다.

어제 저녁이었다. 숙소를 향해 걷던 나는 프렌차이즈 피자가게와 옷가게들의 간판이 보이던 4층짜리 건물을 구경하고 싶었다.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를 한 후 건물에 입장했다. 무려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건물이었다. 액세서리가게들과 오락실 등을 구경하고 카페를 한 곳 발견했다. 아메리카노. 코넛플레이스의 스타벅스 이후로 마시지 못했던 음료. 한국에서는 하루에 두세 잔씩 마시던 그것을 잊고 살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순간 홀린 듯 문을 열었다. 카페에는 브루노마스의 Marry you가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팝송이 괜히 힙스터가 된 느낌을 줬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직원이 메뉴판을 건넸다. 저녁을 먹기 전이었기에 끼니도 해결하고자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치즈버거를 주문했다. 특히 아이스를 강조했다. 기다란 잔에 커피가 가득 담겨 나왔다. 커피와 함께 치즈버거와 하얀 소스와 케첩이 나왔다. 그렇다. 패스트푸드점에서 감자튀김과 함께 주는 그 케첩이 나왔다. 햄버거 뚜껑을 열어보니 별다른 소스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국밥집에서 기호에 맞게 각자 소금을 넣는 것과 비슷한 건가 생각을 하며 햄버거를 제조했다. 빨대를 한 바퀴 휘저었다. 얼음끼리 부딪히며 드르륵 소리가 들렸다. 이 얼마 만에 보는 얼음과 커피인가. 조심히 입안에 커피를 머금었다. 그리고 이 가게엔 에스프레소머신이 없음을 확신했다. 드립커피도 아닌 것 같았다. 항의하고 싶었다. 물론 하지는 못했다. 커피를 다 마실 때 쯤 '나도 물통 하나에 커피를 타서 마시면서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 중 하나는 해외에서 물은 되도록 생수를 사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나라의 물에는 석회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성분이 우리나라 물과 달라서 끓이지 않고 그냥 마시면 설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다. 커피가루를 물에 타서 줬을 어제 저녁 그 아메리카노가 원인이었던 것이다. 라고 나는 강력하게 추측했다.

현지에서 샀던 거친 질감의 두루마리 휴지 대신 쓸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았던 물티슈를 배낭 구석에서 꺼냈다. 난 소중하니까. 사실 여행 준비중에 물티슈를 챙길 생각은 없었다. 갓난아기를 키우는 동생이 조카를 위해 사용하던 물티슈에서 화학성분이 검출됐다고 화내면서 새 물티슈를 사서 잔뜩 남았다며 챙겨준 물티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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