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1
한 글자 한 글자 찾아가며 검색창을 채웠다. rooftop. 화면이 서서히 바뀌며 뜻이 나온다. 옥상. 무지의 대가, 또는 최저가에 눈이 멀었나보다. 호스텔 직원이 안내해주는 옥상의 1인용 텐트에 짐을 풀기는 했으나 마음이 언짢았다. 옥상에는 텐트 네 개와 공용 샤워실과 공용 화장실, 빨랫줄, 라커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내 텐트였고, 다른 텐트는 주인이 없었다. 다시는 앱으로 예약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프론트에서 예약했던 2박을 1박으로 바꾸고 나니 이깟 실수쯤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커룸에 자물쇠를 채워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밖에 나왔다.
바라나시. 인도에 오는 거의 모든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신성한 물줄기 갠지스강이 흐르는 곳. 지나가는 오토릭샤를 세워 가까운 가트로 가자고 했다. 가트는 계단을 의미한다고 한다. 시커먼 매연 사이를 지나서 어떤 골목길에서 내려진 나는 그 골목 끝으로 걸었다. 건물이 끝나는 곳 저 아래에 계단도 보였고 물도 보였다. 그리고 곧 알게 되었다. 이 실망감은 내가 갠지스강에서 어떤 영험함이나 신비로움을 느끼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출처를 모를 흰 배설물들을 조심히 피하며 계단을 내려오니 탁하게 흐르는 물이 가까워졌다. 주변에는 몇 몇 사람들만 보였다. 잠시 계단에 앉아 물을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많은 사람들이 느꼈다는 뭔가가 느껴지지 않았다. 시야를 좀 더 멀게 집중하니 강의 상류 쪽에 북적거리는 움직임이 있음을 발견했다. 꽤 멀어 보였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까. 비쩍 마르고 수염을 기른 수행자, 그야말로 멋쟁이인 카메라를 든 노년의 서양 할아버지를 지나치고 자유롭게 거니는 소들과 그들의 흔적을 피해가며 계속 걸었다. 길은 이어져 있었지만 얼마쯤 걸으면 계단의 시작쯤에 새로운 가트의 이름들이 적혀있었다. 몇 개의 가트들을 지나니 점점 사람도 동물도 똥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크리켓을 하고 있었다. 앉아서 구경을 하다 보니 여러 상인들이 접선을 시도했다. 엽서나 빈디-힌두교 여자들이 이마에 붙이는 스티커 등이었다. 그들을 보내고 나는 계속 상류 쪽으로 걸었다.
얼굴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신체에 무언가를 감거나 겹쳐 입은 소년이 나를 부르더니 들고 있던 바구니 뚜껑을 열었다. 혀를 날름거리는 코브라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나는 그만 욕을 하고 말았다. 소년은 웃으며 만져보라고 내 손을 잡으려 했다. 난 강하게 저항했고 소년은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뱀의 대가리를 쓰다듬기도 하다가 톡톡 치기도 했다. 코브라가 담긴 바구니에는 지폐도 몇 장 함께 담겨있었다. 흔한 경험이 아니기에 남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영어를 못하는 소년에게 나는 만지지는 못하지만 사진을 찍겠다며 얼마의 돈을 주었다. 돈을 주고 사진을 찍는다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아서 한 장 대충 찍고는 인사를 하고 발길을 돌렸다. 바닥에서 피리를 부는 아저씨가 보였다. 피리를 어지럽게 빙빙 돌려가며 부르고 있었고, 그 피리가 향하는 곳에는 코브라가 한 마리 앉아있었다. 몇 분 동안의 관찰로 나는 깨달았다. 피리를 불면 코브라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코브라가 움직일 때 피리를 불어야 한다는 것을.
대개의 소년들이 그렇듯 피부가 까무잡잡한 소년이 보온통을 들고 내 앞에 섰다. 그리고는 어렸을 적에 동내 상갓집에서 종종 봤던 주름지고 얇은 플라스틱 소주잔에 짜이를 따라서 내게 내밀었다. 마치 주문이라도 한 것처럼 잔을 받아들었다. 얼마냐는 질문에 소년은 10루피를 달라고 했다. 지갑엔 100루피 짜리 지폐를 빼면 동전으로 8루피밖에 없었다. 거스름돈이 없다는 소년에게 ‘8루피에 팔래, 네가 마실래?’ 라고 했다. 물론 장난이었지만 조금 폭력적인 질문에 소년은 당연히 8루피를 택했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이거 한국 커피라며 가방에 있던 믹스커피를 꺼내 소년에게 주었다. 소년은 내게 ‘굿맨’이라며 해맑은 미소를 보내며 손을 흔들며 보온통을 들고 갔다. 우리나라 몇몇 카페에서도 파는 ‘차이 티 라떼’가 이 ‘짜이’이다. 내가 굳이 ‘차이’라고 하지 않고 ‘짜이’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주 부르는 이름이었던 짜장면이 표준어가 된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세탁-’이나, ‘찹쌀떡-’아저씨의 특유의 외침처럼 골목 곳곳에서, 심지어 열차 안에서도 일정한 톤으로 ‘짜이-’하는 소리들이 자주 들리기 때문이다. 짜이는 인도의 국민음료다. 많은 사람들이 믹스커피를 마시듯 인도 사람들은 수시로 짜이를 마신다. 밀크티에 설탕 듬뿍 넣고 향신료를 넣은 따뜻한 차다. 생강 향이 났다. 들쩍지근한 맛이 입에 도니 배가 고파졌다.
식당을 찾아서 가트 위로 올라가다가 간판에 익숙한 단어가 보였다. rooftop restaurant. 당장 올라갔다. 비어있는 강이 보이는 테이블에 앉았다. 강이 보이는 식당이라 그런지 메뉴판의 가격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양고기 볶음밥과 콜라를 주문했다. 나의 짧은 팔을 보완해줄 수 있는 최첨단 장비인 셀카봉을 꺼내어 길게 뽑았다. 젊은 외국인 커플과 노년의 외국인 커플이 내게, 정확하게 말하자면 셀카봉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시범을 보이며 설명했다. 몇 개 더 가지고 왔으면 분명 좋은 가격에 팔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연신 굉장하다며 눈을 반짝이는 그들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는 필요 없다며 셀카봉을 던져준 동생에게 짧은 고마움이 들었다.
그날 밤 비가 왔다. 후두둑 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깼다. 낯설고 낮고 좁은 천장에 또 한 번 놀랐다. 루프탑과 텐트라는 단어 두 개가 떠올랐다. 이내 혹시 짐이 빗물에 젖을까 걱정이 들었다. 짐들을 잘 정리해두고 과연 이 텐트는 방수일까 걱정을 하며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린 아침에는 간밤에 언제 그랬냐는 듯 햇빛이 강하게 내리 쬐였다.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내 빨래들만이 어젯밤 날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건너편 지붕에서는 원숭이들이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