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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기차 좌석에는 여러 등급이 있다. 땅이 워낙 넓다보니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침대칸을 이용한다(고 한다). 델리에서 바라나시까지는 2AC, 무갈사라이에서 뉴잘페구리까지는 3AC를 탔다. AC는 에어컨, 앞의 숫자는 몇 층 침대인가를 나타낸다. 당연히 2AC보다 3AC가 저렴했다. 그보다 저렴한 좌석은 SL클래스가 있다. 슬리퍼칸이라고 부르는 SL클래스는 3층 침대에 천장에는 선풍기가 달려있다고 한다. 요즘은 날씨가 더운 편이 아니라 에어컨과 선풍기를 켤 필요가 없기에 SL칸 표를 끊을까 했다. 하지만 저렴한 대신 도난위험이 있다는 글들을 보고 나는 3AC좌석을 택했다. 나는 예약한 3층에 자리를 잡았다. 누워있는 것 외에는 다른 자세를 취할 수 없었다. 열 두 시간 내내 잘 수는 없었기에 미리 휴대폰에 담아온 소설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을 거르니 배가 고팠다. 점심때 쯤 식사를 주문받는 승무원에게 식사를 주문했다. 도시락을 받아들고 나니 정상적으로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1층에는 인도인 가족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 같이 좀 먹읍시다.’ 하고 싶었지만 장소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런 너스레가 갑자기 나오지는 않았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허리를 60도쯤 굽히고 힘겹게 도시락을 먹고 물을 넉넉히 마셨다. 식사를 마친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그동안 한껏 민감해진 장에 채웠으면 비워야한다는 자연의 섭리가 빠르게 찾아왔다. 사실 마음 깊은 곳으로 언젠가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번뇌 끝에 마음을 굳게 먹고 물티슈를 주머니에 챙겨서 1층으로 내려왔다. 허리에 뻐근함이 느껴졌다. 슬쩍 스트레칭을 하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 나를 괄약근에 더욱 집중하도록 했다. 화장실 문을 마주하니 두려웠다. 문에는 정차 중에는 사용하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했다. 문을 여니 예상했던 농후한 암모니아향이 코를 괴롭혔다. 좁은 공간엔 은색으로 반짝이는 스테인리스로 된 재래식 변기가 있었다. 어느 방향을 보고 앉아야 할지 걱정할 필요 가 없도록 친절하게 발을 올려두어야 할 부분에 표시도 되어 있었다. 조준점 부분에는 구멍이 있었다. 그렇다. 구멍. 그 구멍을 통해 레일이 빠르게 지나는 것이 보였다. 문 앞에 적혀있던 ‘정차 중에 사용하지 말라’는 문구가 자연스레 납득되었다. 한껏 영역표시를 하던 중에 적절한 높이, 그러니까 앉아서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곳에 위치한 수도꼭지를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그 용도가 짐작되었다. 물론 현지의 관습을 존중하지만, 어떤 손을 사용해야 하는지 여전히 몰랐던 나는 물티슈를 사용했다. 내 안의 모든 것을 비운 후 혹시 바닥에 넘어질까 싶어 조심스레 복장을 단정히 했다. 이제 내게 남은 과업은 다음 사람을 위해 처참한 분출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변기의 스테인리스는 벽까지 이어져있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이어진 그곳에는 밸브가 있었다. 밸브를 열었다. 츄슉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흘러내렸다. 인도에서의 열차 화장실 첫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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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릭샤. 많은 사람들이 툭툭이라고 부르는 이 탈것은 바퀴가 세 개다. 운전석은 앞에, 손님이 탈 수 있는 공간은 뒤쪽에 위치해 있으며, 그 뒤에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대부분의 툭툭은 인도를 상징하는 노랑, 초록색이 적당히 배치되어 있다. 물론 라이트며, 사이드 미러 등 있을 건 ‘거의’ 다 있다. 다만 문짝이 없다. 대략 24킬로미터를 툭툭으로 이동하는 길은 익사이팅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경적은 급박한 상황에서 눌려지지만 인도의 차에서는 쉴 새 없이 울린다. 문짝이 없었기에 사방에서 울리는 경적소리와 뿜어져 나오는 매연, 밤이라고 나아지지 않았을 스모그 그 자체인 공기, 공기저항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릭샤왈라가 처음에 제안한 750루피를 450루피까지 깎았을 때의 뿌듯함은 이미 사라졌다. 타는 내내 혹여나 배낭이 밖으로 떨어질까 봐 짐칸에 고정시킨 후 한 쪽 팔을 걸어두고 긴장하고 있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다리를 건너고 한적한 도로를 지나다가 릭샤왈라가 갑자기 툭툭을 세웠다. 그는 조금 긴장하고 있는 내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약간의 돈을 들고 가서 자신의 신에게 간단한 의식을 하고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출발했고, 나는 그 사이에 얇은 패딩을 입고 마스크도 착용했다. 처음 가보는 길인데다가 긴장을 해서 그런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작은 상가들이 몰려 있는 거리를 지나 마침내 무갈사라이역에 도착했다. 나는 우선 그에게 약속한 돈을 지불했다. 또 그 어둠과 바람을 헤치고 나를 안전하게 이곳까지 데려다 준 수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뭔가를 주고 싶어서 커피믹스를 선물했다.
역 안 전광판은 열차가 세 시간 연착됐음을 알리고 있었다. 새벽 3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너무 늦은 시간엔 툭툭을 타고 갈 수 없을까봐 여섯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연착이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담요를 가져와서 덮고 느긋하게 앉아있거나 누워있었다. 나도 자리를 잡았다. 적당한 벽에 배낭을 세워두고 바닥에 종이를 깔았다. 등을 기댔다. 자다 깨다를 몇 번 반복하면서 인도 열차 앱으로 지금 기차가 어디쯤에 있는지 수시로 체크했다. 그러던 중에 어떤 할아버지가 내 앞으로 왔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지 계속해서 힌디어로 나에게 표를 보여주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많은 인도인들이 있는데 왜 하필 나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하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힌디어는 안녕하세요, 꺼져, 감사합니다. 세 개 뿐이었다. 수 분간의 교감 끝에 나는 노인의 의중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실시간으로 열차 시간을 확인하는 나를 보고 자신의 기차가 언제 도착하는지가 알고 싶었다. 나는 기차표에 적힌 열차 번호를 입력하고 언제 도착하는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어디서 타야 하는지 숫자와 그림을 종이에 적어가며 설명해줬다. 여위고 주름진 검은손으로 종이를 받아들며 할아버지는 내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외국에서조차 고맙다는 말에 어떻게 대처해야할 줄 몰랐다. 일어나 고개를 함께 숙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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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후에 급작스럽게 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인도에 체류할 수 있는 날은 최대 30일이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디서 며칠을 보낼 건지 정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느껴졌었다. 좋으면 더 묵고 싫으면 빨리 떠나자. 라는 생각으로 인도 지도를 프린트해서 가고 싶은 곳들을 표시했다. 그러고 나니 대부분이 북인도 지방이어서 남인도를 제외한 북쪽의 도시들 중 동선 상으로 갈 수 있는 곳들만 연결해서 대략적인 루트가 정해졌다.
다음 목적지는 다르질링이었다. 홍차의 이름인줄로만 알았던 그것이 찻잎이 나오는 지역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인도 여행을 결정하고 난 이후였다. ‘뜨거운 액체를 먹는 것은 국과 찌개정도면 충분하다.’ 는 평소의 지론대로 따뜻한 차를 멀리해온 내게는 무려 세계 3대 홍차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 다르질링의 차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단지 히말라야산맥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나를 끌어당겼다. 날씨가 좋을 때는 칸첸중가라는 산이 보인다고 했다. 산을 좋아하는 것도, 평소 히말라야에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르질링에 가는 최선의 방법을 얻기 위해 거듭된 검색을 마친 끝에 결국 바라나시에서 바로 가는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은 바라나시에서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무갈사라이역으로 가야했다. 오토릭샤를 타고 바라나시역으로 가서 다음날 저녁 기차표를 예매했다. 밤에 타는 기차는 이동과 숙소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받아든 표에서는 12시간에 조금 못 미치는 이동시간이 적혀있었다. 돌아와서는 바라나시의 마지막 날을 즐기기 위해 더욱 영역을 넓혀서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어둑해져 문 닫을 시간이 되자 과일을 떨이로 파는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흥정을 거쳐서 석류와 바나나를 샀다.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몇 가지 과자와 음료수를 샀다. 침대에 엎어져서 과일과 과자를 먹으며 일기를 썼다. 이 평화로운 느낌을 최대한 오래 기억해두고 싶었다.
체크아웃시간이 11시였기에 잠에서 깨자마자 짐을 챙겼다. 내가 가져간 가방은 두 개였다. 친구에게 빌린 등산용 가방과 지갑이나 수첩 등 간편한 짐만 넣어 메고 돌아다닐 수 있는 작은 백팩 하나다. 대충 손빨래로 빨아 말려둔 속옷도 챙기고 친구의 부탁으로 돌아다닐 때마다 산 엽서들도 가방 한편에 넣었다. 가져간 얇은 패딩의 부피를 최대한 줄여보려 이렇게 저렇게 접어 보다가 돌돌 말아 꾹 눌러 공기가 빠졌을 때 여분의 공간에 쑤셔 넣는 것으로 짐정리를 마쳤다. 귀중품들(이래봤자 여권과 나름 고액권의 루피와 달러)을 복대지갑에 넣고 티셔츠 안쪽에 버클을 채우는 것으로 나갈 채비도 완료했다. 아직 열차시간까지는 열두 시간도 더 남았다. 연착될 것을 생각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벌써부터 기차표를 지갑에 고이 접어서 넣으면서 너무 준비에 대한 강박이 심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한데. 그러고 보면 여행은 그런 것 같다. 익숙한 습관과 관습으로 인해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무지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새로운 환경에서 발견한 자신의 면면을 고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일 것이다.
짐을 앞뒤로 짊어지고 계단을 내려와 1층 프론트에 키를 반납하고 키 보증금을 받았다. 잊고 있었는데 공돈을 얻은 느낌이었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골목에서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몇 번 지나가면서 인사를 한 사이였다. 그는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도 않는 골목 한 쪽에서 옷을 걸어두고 파는 사람이었다. 만날 때마다 옷 하나 사가라고 하면 의례적으로 바라나시 떠나기 전에 사겠다고 했었는데 딱 마주친 것이다. 안산다고 지나쳐도 그만이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며칠간이었지만 매일 인사하는 사이가 아니었는가. 그래서 나는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고 거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놓은 옷들을 보는 시늉을 했다. 아저씨는 내게 옷을 걸어둔 벽 옆의 입구, 즉 자신의 집처럼 보이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차라도 주려고 하려나보다 생각하고 따라갔다. 등이 없는 어두운 통로 왼쪽으로 난 문(문짝은 없었다)에는 두꺼운 흰색 담요가 깔려있는 공간이 있었다. 들어오라는 그의 말에 슬리퍼를 벗고 들어갔다. 사방에 옷이 쌓여있었다. 푹신한 바닥에 나를 바닥에 앉히고 그는 손에 집히는 대로 내 앞에 옷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옷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대충 둘러대며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생각했다. 옷은 계속 쌓여갔다. 잠깐만, 제가 볼게요. 내 말에 아저씨는 옷을 집다가 멈췄다. 고개를 돌리다가 눈에 들어오는 옷에 시선을 고정하자마자 아저씨는 재빨리 그 라인의 옷들을 죄다 꺼내서 펼쳐놓기 시작했다. 부담을 줘서 판매하는 전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필요한 것을 사자. 나는 짐을 늘리기 싫어서 사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사기로 했다. 바로 알리바바바지였다. 그들이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은 아닐 테지만 내가 주고 싶은 선물이다. 나는 알리바바바지를 보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수많은 알리바바바지들이 티셔츠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몇 가지 괜찮아 보이는 바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것들을 집어 한 쪽에 뒀다. 잠깐 쉬자고 제안했더니 그제야 아저씨는 내게 짜이 좀 마실 테냐고 물었다. 컵을 받아들고 이야기를 나눴다. 어디에서 왔는지, 다음엔 어디로 가는지를 이야기하고 한국 사진을 보고 싶다고 해서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그때 알았다. 내 사진첩에는 한국적인 것이 별로 없었다. 커피, 유럽풍 인테리어, 술, 음식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차를 다 마신 후 본격적인 거래가 시작되었다. 너무 비싸다는 나의 주장과 이것은 네가 입은 싸구려 바지(실제로 쌌다)와 질이 다르다며 직접 재질을 비교해 보이는 아저씨의 주장에 결국 골라놓은 바지 중 몇 개를 빼놓고 사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다시 배낭에 공간을 내어 바지를 눌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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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들은 갠지스강을 ‘강가’ 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나는 강가강가에 앉아 바라나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루가 길었다. 은근히 기대했던 깨달음은 오지 않았다. 대신 온갖 상인들이 왔다. 짜이 소년이 와서 한 잔 따라주면 마셨고, 엽서를 파는 소녀가 와서 종류별로 펼쳐놓기 시작하면 하는 수 없이 한두 장 샀다. 여느 때처럼 햇빛을 피해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요가매트 또는 천을 깔아두고 엎어져서 마사지를 받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어떤 남자가 다가와 마사지 한 번 할 테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시원했다. 그것도 몹시. 저 강력한 악력으로 수년간 꾸준하게 뭉쳐온 내 어깨를 풀어주면 얼마나 좋을까를 잠시 생각했지만 정신을 다잡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 진짜 나 돈 없어, 라고 말하자 그는 돈을 받지 않겠다며 나를 매트 앞으로 인도했다. 엄청난 내적 갈등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난 이미 신발을 벗고 매트 위로 올라가있었다. 남자는 내 발을 두 손으로 움켜잡더니 힘을 주었다. 부끄러움, 시원함과 원인을 모르는 미안함 등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되기 시작했다. 더러운 내 발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잡고 이렇게나 시원하게 마사지를 해주다니... 혹시 이 사람은 천사인가. 하는 생각과 결국 난 돈을 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끊임없이 싸웠다. 그가 온 힘을 다해 팔꿈치로 등 여기저기를 누를 때쯤 나는 그가 받지 않는다고 거절한대도 돈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나와 요가매트는 물아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마사지가 끝났음을 알렸다. 나는 옷을 추스르며 진심을 담아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3천루피를 요구했다. 찰나의 시간에 감사함이 분노로 바뀌었다. 공짜라고 했잖아, 라고 말하는 나와 풀 마사지를 받았으니 돈을 내놔라. 라고 하는 그와의 실랑이는 결국 300루피로 합의를 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마음속으로는 분한 마음이 남았지만 온 몸에는 시원함이 남아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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