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여행에 해당되는 글 19건
글
4
당연하게 다르질링에는 차를 파는 곳이 많은 편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순대골목, 떡볶이거리처럼 빽빽한 밀도의 경쟁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광장 쪽에 두 개의 가게가 붙어 있고, 언덕 아래쪽에 두세 군데 정도 본 것이 전부다. 그래서 어디가 진짜 원조집인지 고민해야할 필요가 없었다.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넓지 않은 공간에 수많은 찻잎들이 각종 크기의 포장에 쌓여있거나, 밀폐된 유리병 안에 들어있었다. 다르질링, 아쌈 등 찻잎의 원산지와 수확 시기, 어떤 향이 나는지도 쓰여 있었다. 가게 한편에서는 몇 명의 사람들이 찻잎의 무게를 달아 포장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이거야말로 프랑스에서 생수를 떠오거나, 남태평양에서 참치를 직접 공수해오는 것이 아닌가.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눈이 몇 번이나 마주쳤음에도 사람들은 내게 무신경했다. 직원에게 안내를 요구했다. 그제야 직원은 나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녹차와 홍차, 특별한 향이 있는 차 등 메뉴가 너무나도 다양했다. 가격도 차이가 컸다. 가장 기본적인 다르질링에서 수확한 홍차를 주문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자연 그 자체였다. 봉우리와 조금 더 먼 봉우리, 그것보다 조금 더 먼 봉우리. 가방을 열어 수첩과 펜을 꺼냈다. 그리고 남은 예산과 선물에 쓸 수 있는 돈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내 앞에 투명한 받침이 내려왔고, 그 위로 투명한 찻잔에 담긴 홍차가 올려졌다. 이내 찻숟가락과 설탕이 담긴 통까지 모두 준비가 되었다. 태양과 가까운 곳에서 그 빛을 받아가며 자란 잎,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차를 생산해 온 전통까지. 찻잔에 담긴 것은 붉은색도, 녹색도, 노란색도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색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더없이 맑아 보이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홍차 중 하나인 다르질링의 홍차, 잔을 들어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목으로 넘겼다. 뭐랄까.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겐 차에 대한 경험이 없었음을. 기껏해야 티백에 담긴 현미녹차정도 마셔본 나는 이 묘한 향의 가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혹시 갑작스레 차에 눈을 뜨지 않을까 싶어서 아주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찻잔의 차가 줄어들면서 선물 리스트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차를 고르기 시작했다. 스스로 책정한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서 선택권이 그리 높지 않았다. 당연히 포장에 따라 차 가격이 달랐다. 껌의 내포장지로 쓰이는 재질과 유사한 종이의 거대한 버전이랄까, 그런 포장지에 끈으로 묶는 포장에 다르질링에서 재배된 차를 골랐다. 수확 시기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르다고 했지만 그 차이가 크지 않길 바라면서 저렴한 것을 골랐다. 직원이 그것들을 한 덩이마다 신문지로 다시 포장한 후 쇼핑백에 담아서 내게 건넸다.
숙소로 돌아와 배낭의 가장 깊숙한 곳에 쇼핑백을 집어넣었다. 처음으로 짐이 늘었다. 아직도 인도에 머무를 시간은 꽤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다시 돌아갈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출발할 때부터, 그리고 여행 중에도 항상 생각했다. 그 날의 즐거움, 그 순간의 행복을 즐기자고. 하지만 또다시 짐을 늘리고 있었다. 이 무게가 다르질링에서 직접 사온 차를 건네는 내 모습이 아니라, 차를 받을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이길 바랐다.
설정
트랙백
댓글
글
2
추웠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추웠다. 침낭에서 손을 꺼내 이불을 걷었다. 번데기가 탈피하듯 침낭의 지퍼를 내려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패딩 때문에 몸이 둔했다. 엉덩이를 이용해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침대 밖으로 발을 겨우 디뎠다. 바닥에는 싸구려 카펫이 깔려있었다. 나무로 된 창문을 열어보니 바깥 풍경이 보였다. 모처럼만에 괜찮은 풍경이 보였다. 언덕 아래 낮은 집들의 옥상과 안개가 그야말로 자연스러웠다. 돈 좀 쓴 보람이 있었다. 발품을 꽤나 팔았음에도 빈 객실이 없거나 비싸다는 이유로 언덕을 조금씩 올라와 광장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다. 그래봐야 만 원 정도밖에 안하지만 그동안 지냈던 숙소들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가격이다. 방은 깔끔했고 심지어 텔레비전도 있었다. 밤새 텁텁해진 입안을 양치로 정화시키고 본격적으로 씻기 위해 카운터로 갔다. 왜 카운터로 갔느냐고?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하면 십 분 정도 후에 양동이로 가져다주는 시스템이다. 보통의 경우에 비싸다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싸다는 것은 불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기꺼이 숙박비를 줄이기 위해 제한된 뜨거운 물을 십 분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생각해보면 프랜차이즈 커피 한 잔 마실 돈이면 훨씬 편해질 수 있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화장실의 요상한 구조상 변기가 그 방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아직도 수분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는 대장 덕에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려야 했다. 화장실에 쪼그려 앉을 때면 뭔가 굉장히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높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변기 옆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왔다. 굉장히 차가운 물이었다. 대야에 직원이 가져다준 양동이의 물과 찬물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머리도 얼굴도 발도 씻었다. 남은 물로는 빨래도 했다.
숙소 등급이 한 단계 정도 오르기는 했지만 아직 조식을 제공받는 수준은 아니었다. 운동화를 신었다. 그것으로 외출 준비는 끝이었다. 가방을 메고 찬찬히 언덕을 내려왔다. 동네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인사를 했다. 안녕 바부.
아침은 길거리에서 파는 모모를 먹었다. 만두다. 고기모모와 야채모모가 있었다. 우리나라와 똑같았다. 약간 향이 다른 것 외에는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새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간단한 표시로 고기가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과자에도 표시가 되어 있다. 초록색 동그라미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고, 빨간색 동그라미는 고기가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생수를 사러 가게에 들렀다가 초록색 동그라미가 있는 라면도 하나 샀다. 그리고는 부셔서 스프를 뿌렸다. 생라면을 집어먹으며 초우라스타광장 벤치에서 햇빛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 산책로를 걸었다. 노점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옷을 걸어두고 있었다. 나는 관심 있는 척 옷들을 구경하면서 떠나는 날 사겠노라며 아주 천천히 이동했다. 벤치에 앉았다가 누웠다가 노래도 들었다가 따라 부르기도 하니 안개가 걷히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더 이상 꼭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무감은 없었다.
산책로는 언덕을 빙 둘러 한 바퀴를 도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피부병에 걸린 개들과 각종 동물들의 배설물들이 부비트랩처럼 널려있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길은 깨끗했고 돌아다니는 개들도 멀쩡했다. 한가롭게 하품을 하며 누워있던 강아지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고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아!”
마음의 소리가 아니었다.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감탄사가! 나에게선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행동이다. 내 시선 끝에는 허공에, 그러니까 파란 하늘에 구름처럼 걸려있는 설산이 있었다. 안경을 벗어 티셔츠로 문질러 닦아 다시 썼다. 신기루도 아니고, 구름도 아니다. 파라마운트 배급 영화가 스크린에 걸린 듯 내 눈 앞에 눈 덮인 산이 걸려있었다. 멀리 있었기에 크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원근을 초월하는 크기의 그 존재에 압도되었다. 갑자기 마주친 산은 나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경외감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철저하게 이성적이라고 생각해왔던 내게서 애니미즘을 발견했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마구 찍었다. 확대해서도 찍어보고 온갖 설정들을 바꿔 찍어보았지만 담기지 않았다. 형태는 찍혔지만 내가 본 그 느낌은 담기지 않았다. 처음으로 있지도 않은 고급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나는 서둘러 산책로를 따라 이리 저리 자리를 옮기다가 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 칸첸중가가 내 앞에 있었다. 그렇게 벅차오른 상태로 나는 몇 시간동안 앉아서 계속 산을 바라봤다. 절경, 비경, 그림 같은 따위의 어떤 형용사로도 형용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를 이곳에 끌어들인 것은 홍차도 뭣도 아닌 칸첸중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정
트랙백
댓글
글
9
인도 기차 좌석에는 여러 등급이 있다. 땅이 워낙 넓다보니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침대칸을 이용한다(고 한다). 델리에서 바라나시까지는 2AC, 무갈사라이에서 뉴잘페구리까지는 3AC를 탔다. AC는 에어컨, 앞의 숫자는 몇 층 침대인가를 나타낸다. 당연히 2AC보다 3AC가 저렴했다. 그보다 저렴한 좌석은 SL클래스가 있다. 슬리퍼칸이라고 부르는 SL클래스는 3층 침대에 천장에는 선풍기가 달려있다고 한다. 요즘은 날씨가 더운 편이 아니라 에어컨과 선풍기를 켤 필요가 없기에 SL칸 표를 끊을까 했다. 하지만 저렴한 대신 도난위험이 있다는 글들을 보고 나는 3AC좌석을 택했다. 나는 예약한 3층에 자리를 잡았다. 누워있는 것 외에는 다른 자세를 취할 수 없었다. 열 두 시간 내내 잘 수는 없었기에 미리 휴대폰에 담아온 소설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을 거르니 배가 고팠다. 점심때 쯤 식사를 주문받는 승무원에게 식사를 주문했다. 도시락을 받아들고 나니 정상적으로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1층에는 인도인 가족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 같이 좀 먹읍시다.’ 하고 싶었지만 장소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런 너스레가 갑자기 나오지는 않았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허리를 60도쯤 굽히고 힘겹게 도시락을 먹고 물을 넉넉히 마셨다. 식사를 마친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그동안 한껏 민감해진 장에 채웠으면 비워야한다는 자연의 섭리가 빠르게 찾아왔다. 사실 마음 깊은 곳으로 언젠가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번뇌 끝에 마음을 굳게 먹고 물티슈를 주머니에 챙겨서 1층으로 내려왔다. 허리에 뻐근함이 느껴졌다. 슬쩍 스트레칭을 하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 나를 괄약근에 더욱 집중하도록 했다. 화장실 문을 마주하니 두려웠다. 문에는 정차 중에는 사용하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했다. 문을 여니 예상했던 농후한 암모니아향이 코를 괴롭혔다. 좁은 공간엔 은색으로 반짝이는 스테인리스로 된 재래식 변기가 있었다. 어느 방향을 보고 앉아야 할지 걱정할 필요 가 없도록 친절하게 발을 올려두어야 할 부분에 표시도 되어 있었다. 조준점 부분에는 구멍이 있었다. 그렇다. 구멍. 그 구멍을 통해 레일이 빠르게 지나는 것이 보였다. 문 앞에 적혀있던 ‘정차 중에 사용하지 말라’는 문구가 자연스레 납득되었다. 한껏 영역표시를 하던 중에 적절한 높이, 그러니까 앉아서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곳에 위치한 수도꼭지를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그 용도가 짐작되었다. 물론 현지의 관습을 존중하지만, 어떤 손을 사용해야 하는지 여전히 몰랐던 나는 물티슈를 사용했다. 내 안의 모든 것을 비운 후 혹시 바닥에 넘어질까 싶어 조심스레 복장을 단정히 했다. 이제 내게 남은 과업은 다음 사람을 위해 처참한 분출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변기의 스테인리스는 벽까지 이어져있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이어진 그곳에는 밸브가 있었다. 밸브를 열었다. 츄슉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흘러내렸다. 인도에서의 열차 화장실 첫 경험이었다.
설정
트랙백
댓글
글
8
오토릭샤. 많은 사람들이 툭툭이라고 부르는 이 탈것은 바퀴가 세 개다. 운전석은 앞에, 손님이 탈 수 있는 공간은 뒤쪽에 위치해 있으며, 그 뒤에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대부분의 툭툭은 인도를 상징하는 노랑, 초록색이 적당히 배치되어 있다. 물론 라이트며, 사이드 미러 등 있을 건 ‘거의’ 다 있다. 다만 문짝이 없다. 대략 24킬로미터를 툭툭으로 이동하는 길은 익사이팅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경적은 급박한 상황에서 눌려지지만 인도의 차에서는 쉴 새 없이 울린다. 문짝이 없었기에 사방에서 울리는 경적소리와 뿜어져 나오는 매연, 밤이라고 나아지지 않았을 스모그 그 자체인 공기, 공기저항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릭샤왈라가 처음에 제안한 750루피를 450루피까지 깎았을 때의 뿌듯함은 이미 사라졌다. 타는 내내 혹여나 배낭이 밖으로 떨어질까 봐 짐칸에 고정시킨 후 한 쪽 팔을 걸어두고 긴장하고 있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다리를 건너고 한적한 도로를 지나다가 릭샤왈라가 갑자기 툭툭을 세웠다. 그는 조금 긴장하고 있는 내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약간의 돈을 들고 가서 자신의 신에게 간단한 의식을 하고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출발했고, 나는 그 사이에 얇은 패딩을 입고 마스크도 착용했다. 처음 가보는 길인데다가 긴장을 해서 그런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작은 상가들이 몰려 있는 거리를 지나 마침내 무갈사라이역에 도착했다. 나는 우선 그에게 약속한 돈을 지불했다. 또 그 어둠과 바람을 헤치고 나를 안전하게 이곳까지 데려다 준 수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뭔가를 주고 싶어서 커피믹스를 선물했다.
역 안 전광판은 열차가 세 시간 연착됐음을 알리고 있었다. 새벽 3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너무 늦은 시간엔 툭툭을 타고 갈 수 없을까봐 여섯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연착이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담요를 가져와서 덮고 느긋하게 앉아있거나 누워있었다. 나도 자리를 잡았다. 적당한 벽에 배낭을 세워두고 바닥에 종이를 깔았다. 등을 기댔다. 자다 깨다를 몇 번 반복하면서 인도 열차 앱으로 지금 기차가 어디쯤에 있는지 수시로 체크했다. 그러던 중에 어떤 할아버지가 내 앞으로 왔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지 계속해서 힌디어로 나에게 표를 보여주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많은 인도인들이 있는데 왜 하필 나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하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힌디어는 안녕하세요, 꺼져, 감사합니다. 세 개 뿐이었다. 수 분간의 교감 끝에 나는 노인의 의중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실시간으로 열차 시간을 확인하는 나를 보고 자신의 기차가 언제 도착하는지가 알고 싶었다. 나는 기차표에 적힌 열차 번호를 입력하고 언제 도착하는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어디서 타야 하는지 숫자와 그림을 종이에 적어가며 설명해줬다. 여위고 주름진 검은손으로 종이를 받아들며 할아버지는 내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외국에서조차 고맙다는 말에 어떻게 대처해야할 줄 몰랐다. 일어나 고개를 함께 숙일 뿐이었다.
설정
트랙백
댓글
글
7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후에 급작스럽게 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인도에 체류할 수 있는 날은 최대 30일이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디서 며칠을 보낼 건지 정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느껴졌었다. 좋으면 더 묵고 싫으면 빨리 떠나자. 라는 생각으로 인도 지도를 프린트해서 가고 싶은 곳들을 표시했다. 그러고 나니 대부분이 북인도 지방이어서 남인도를 제외한 북쪽의 도시들 중 동선 상으로 갈 수 있는 곳들만 연결해서 대략적인 루트가 정해졌다.
다음 목적지는 다르질링이었다. 홍차의 이름인줄로만 알았던 그것이 찻잎이 나오는 지역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인도 여행을 결정하고 난 이후였다. ‘뜨거운 액체를 먹는 것은 국과 찌개정도면 충분하다.’ 는 평소의 지론대로 따뜻한 차를 멀리해온 내게는 무려 세계 3대 홍차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 다르질링의 차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단지 히말라야산맥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나를 끌어당겼다. 날씨가 좋을 때는 칸첸중가라는 산이 보인다고 했다. 산을 좋아하는 것도, 평소 히말라야에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르질링에 가는 최선의 방법을 얻기 위해 거듭된 검색을 마친 끝에 결국 바라나시에서 바로 가는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은 바라나시에서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무갈사라이역으로 가야했다. 오토릭샤를 타고 바라나시역으로 가서 다음날 저녁 기차표를 예매했다. 밤에 타는 기차는 이동과 숙소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받아든 표에서는 12시간에 조금 못 미치는 이동시간이 적혀있었다. 돌아와서는 바라나시의 마지막 날을 즐기기 위해 더욱 영역을 넓혀서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어둑해져 문 닫을 시간이 되자 과일을 떨이로 파는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흥정을 거쳐서 석류와 바나나를 샀다.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몇 가지 과자와 음료수를 샀다. 침대에 엎어져서 과일과 과자를 먹으며 일기를 썼다. 이 평화로운 느낌을 최대한 오래 기억해두고 싶었다.
체크아웃시간이 11시였기에 잠에서 깨자마자 짐을 챙겼다. 내가 가져간 가방은 두 개였다. 친구에게 빌린 등산용 가방과 지갑이나 수첩 등 간편한 짐만 넣어 메고 돌아다닐 수 있는 작은 백팩 하나다. 대충 손빨래로 빨아 말려둔 속옷도 챙기고 친구의 부탁으로 돌아다닐 때마다 산 엽서들도 가방 한편에 넣었다. 가져간 얇은 패딩의 부피를 최대한 줄여보려 이렇게 저렇게 접어 보다가 돌돌 말아 꾹 눌러 공기가 빠졌을 때 여분의 공간에 쑤셔 넣는 것으로 짐정리를 마쳤다. 귀중품들(이래봤자 여권과 나름 고액권의 루피와 달러)을 복대지갑에 넣고 티셔츠 안쪽에 버클을 채우는 것으로 나갈 채비도 완료했다. 아직 열차시간까지는 열두 시간도 더 남았다. 연착될 것을 생각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벌써부터 기차표를 지갑에 고이 접어서 넣으면서 너무 준비에 대한 강박이 심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한데. 그러고 보면 여행은 그런 것 같다. 익숙한 습관과 관습으로 인해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무지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새로운 환경에서 발견한 자신의 면면을 고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일 것이다.
짐을 앞뒤로 짊어지고 계단을 내려와 1층 프론트에 키를 반납하고 키 보증금을 받았다. 잊고 있었는데 공돈을 얻은 느낌이었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골목에서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몇 번 지나가면서 인사를 한 사이였다. 그는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도 않는 골목 한 쪽에서 옷을 걸어두고 파는 사람이었다. 만날 때마다 옷 하나 사가라고 하면 의례적으로 바라나시 떠나기 전에 사겠다고 했었는데 딱 마주친 것이다. 안산다고 지나쳐도 그만이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며칠간이었지만 매일 인사하는 사이가 아니었는가. 그래서 나는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고 거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놓은 옷들을 보는 시늉을 했다. 아저씨는 내게 옷을 걸어둔 벽 옆의 입구, 즉 자신의 집처럼 보이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차라도 주려고 하려나보다 생각하고 따라갔다. 등이 없는 어두운 통로 왼쪽으로 난 문(문짝은 없었다)에는 두꺼운 흰색 담요가 깔려있는 공간이 있었다. 들어오라는 그의 말에 슬리퍼를 벗고 들어갔다. 사방에 옷이 쌓여있었다. 푹신한 바닥에 나를 바닥에 앉히고 그는 손에 집히는 대로 내 앞에 옷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옷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대충 둘러대며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생각했다. 옷은 계속 쌓여갔다. 잠깐만, 제가 볼게요. 내 말에 아저씨는 옷을 집다가 멈췄다. 고개를 돌리다가 눈에 들어오는 옷에 시선을 고정하자마자 아저씨는 재빨리 그 라인의 옷들을 죄다 꺼내서 펼쳐놓기 시작했다. 부담을 줘서 판매하는 전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필요한 것을 사자. 나는 짐을 늘리기 싫어서 사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사기로 했다. 바로 알리바바바지였다. 그들이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은 아닐 테지만 내가 주고 싶은 선물이다. 나는 알리바바바지를 보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수많은 알리바바바지들이 티셔츠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몇 가지 괜찮아 보이는 바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것들을 집어 한 쪽에 뒀다. 잠깐 쉬자고 제안했더니 그제야 아저씨는 내게 짜이 좀 마실 테냐고 물었다. 컵을 받아들고 이야기를 나눴다. 어디에서 왔는지, 다음엔 어디로 가는지를 이야기하고 한국 사진을 보고 싶다고 해서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그때 알았다. 내 사진첩에는 한국적인 것이 별로 없었다. 커피, 유럽풍 인테리어, 술, 음식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차를 다 마신 후 본격적인 거래가 시작되었다. 너무 비싸다는 나의 주장과 이것은 네가 입은 싸구려 바지(실제로 쌌다)와 질이 다르다며 직접 재질을 비교해 보이는 아저씨의 주장에 결국 골라놓은 바지 중 몇 개를 빼놓고 사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다시 배낭에 공간을 내어 바지를 눌러 넣었다.
설정
트랙백
댓글
글
6
인도인들은 갠지스강을 ‘강가’ 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나는 강가강가에 앉아 바라나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루가 길었다. 은근히 기대했던 깨달음은 오지 않았다. 대신 온갖 상인들이 왔다. 짜이 소년이 와서 한 잔 따라주면 마셨고, 엽서를 파는 소녀가 와서 종류별로 펼쳐놓기 시작하면 하는 수 없이 한두 장 샀다. 여느 때처럼 햇빛을 피해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요가매트 또는 천을 깔아두고 엎어져서 마사지를 받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어떤 남자가 다가와 마사지 한 번 할 테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시원했다. 그것도 몹시. 저 강력한 악력으로 수년간 꾸준하게 뭉쳐온 내 어깨를 풀어주면 얼마나 좋을까를 잠시 생각했지만 정신을 다잡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 진짜 나 돈 없어, 라고 말하자 그는 돈을 받지 않겠다며 나를 매트 앞으로 인도했다. 엄청난 내적 갈등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난 이미 신발을 벗고 매트 위로 올라가있었다. 남자는 내 발을 두 손으로 움켜잡더니 힘을 주었다. 부끄러움, 시원함과 원인을 모르는 미안함 등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되기 시작했다. 더러운 내 발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잡고 이렇게나 시원하게 마사지를 해주다니... 혹시 이 사람은 천사인가. 하는 생각과 결국 난 돈을 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끊임없이 싸웠다. 그가 온 힘을 다해 팔꿈치로 등 여기저기를 누를 때쯤 나는 그가 받지 않는다고 거절한대도 돈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나와 요가매트는 물아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마사지가 끝났음을 알렸다. 나는 옷을 추스르며 진심을 담아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3천루피를 요구했다. 찰나의 시간에 감사함이 분노로 바뀌었다. 공짜라고 했잖아, 라고 말하는 나와 풀 마사지를 받았으니 돈을 내놔라. 라고 하는 그와의 실랑이는 결국 300루피로 합의를 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마음속으로는 분한 마음이 남았지만 온 몸에는 시원함이 남아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설정
트랙백
댓글
글
5
헤나를 했다. 간판에는 서툰 한글로 『미나헤나샵』 이라고 쓰여 있었다. 헤나샵 주인은 자기 이름이 미나라고 했다. 미나 누나는 다양한 무늬들이 있는 디자인리스트를 보여주며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골라보라고 했다. 내가 사진을 넘기는 동안 그녀는 자부심 가득한 눈빛과 말투로 자신이 직접 고안한 무늬라는 것을 강조했다. 적당한 사진을 택했다. 약간의 준비를 마친 후, 내 손등 위의 조그만 튜브 끝에서는 진한 갈색의 액체보다 고체에 가까운 끈적끈적한 것이 나왔다. 미나 누나가 능숙한 솜씨로 내 손등 위에 튜브를 짜기 시작했다. 처음에 해바라긴가 했던 문양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내 그녀는 프리스타일로 손등에 그림을 얹었다. 파스를 바른 듯 시원해졌다. 그녀는 작업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요컨대 이 구역의 원조 헤나샵은 자기이며, 자신의 헤나에 대해 많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내 경험은 아니었지만 카페에서 자주 본 빠하르간지의 헤나 사기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물가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어리바리한 초짜 여행객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장사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네일샵에서 그녀들이 왜 그렇게 수다를 떠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손등 위에 갯지렁이 똥처럼 얹어진 헤나가 어느 정도 마르기를 기다릴 때쯤, 머리에 붕대를 감은 꼬맹이가 들어왔다. 꼬맹이가 나에게 나마스테라고 하기에 나도 나마스테라고 했다. 미나 누나의 아들이라고 했다. '바부'라고 부르기에, 안타까운 이름이구나 생각했다. 바부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몇 마디 나누고 재빠르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마 하교 후 나가서 놀러 나가는 게 아닌가 생각됐다. 이어서 미나 누나가 이야기하길 자신은 1, 3학년 아들, 딸을 두고 있다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 까지는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자식 이야기를 하는 그 눈에서 행복이 보였다. 갑자기 뭔가 선물을 주고 싶었다. 가방에서 빨간색, 파란색 볼펜을 꺼내서 '바부'에게 주라고 했다. 몹시 기뻐하던 미나 누나는 바부는 그냥 인도에서 꼬맹이들한테 부르는 스윗네임이라고 알려줬다. 하나도 스윗하지 않지만 좋은걸 알았다. 지나가는 꼬맹이한테 바부라고 해야지.
미나 누나가 건넨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남긴 방명록 한 쪽에 짧게 글도 남겼다. 특히 방명록을 넘기면서 이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인데, 라며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그녀는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미나 누나는 새 명함을 만들어야 된다며 한글로 ‘미나 헤나샵’ 이라고 종이에 써달라고 했다. 내 주변에 소문난 악필인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미안한 제안이었다. 곧 나는 펜을 들고 공들여 글씨를 썼다. 판본체로. 여기랑 여기는 붙여서 쓰는 것이냐, 이건 동그랗게 쓰는 것이냐, 묻는 그녀의 말에 자세하게 한글을 지도해주었다. 고맙다며 서비스로 오른손 손바닥에 럭키워드라며 '옴'을 써줬다. 시바신의 어쩌고 하던데 못 알아들었다. 머리 아플 때 조용한 방에서 앉아서 손을 모으고 '옴~'하고서 미간에 집중하면 두통도 낫는다고 했다. 혹시 아랫배에 집중하면 설사도 낫는지 묻고 싶었다. 갯지렁이 똥이 완전히 굳으면 두 시간 정도 지나서 툭툭 털어내라는 처방을 받고 미나 헤나샵에서 나왔다.
설정
트랙백
댓글
글
4
느낌이 좋지 않았다. 평소의 퐁당퐁당이 아닌 폭포수소리가 났다. 사실 변기에 앉기 전부터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내 몸은 내가 잘 아니까. 생각하는 사람처럼 무릎에 팔꿈치를 괸 채로 눈을 감았다. 아랫배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잉태된 느낌이었다. 이 묽은 변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렸다가 용의선상에서 점차 줄어들며 한 가지로 확신이 들었다.
어제 저녁이었다. 숙소를 향해 걷던 나는 프렌차이즈 피자가게와 옷가게들의 간판이 보이던 4층짜리 건물을 구경하고 싶었다.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를 한 후 건물에 입장했다. 무려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건물이었다. 액세서리가게들과 오락실 등을 구경하고 카페를 한 곳 발견했다. 아메리카노. 코넛플레이스의 스타벅스 이후로 마시지 못했던 음료. 한국에서는 하루에 두세 잔씩 마시던 그것을 잊고 살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순간 홀린 듯 문을 열었다. 카페에는 브루노마스의 Marry you가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팝송이 괜히 힙스터가 된 느낌을 줬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직원이 메뉴판을 건넸다. 저녁을 먹기 전이었기에 끼니도 해결하고자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치즈버거를 주문했다. 특히 아이스를 강조했다. 기다란 잔에 커피가 가득 담겨 나왔다. 커피와 함께 치즈버거와 하얀 소스와 케첩이 나왔다. 그렇다. 패스트푸드점에서 감자튀김과 함께 주는 그 케첩이 나왔다. 햄버거 뚜껑을 열어보니 별다른 소스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국밥집에서 기호에 맞게 각자 소금을 넣는 것과 비슷한 건가 생각을 하며 햄버거를 제조했다. 빨대를 한 바퀴 휘저었다. 얼음끼리 부딪히며 드르륵 소리가 들렸다. 이 얼마 만에 보는 얼음과 커피인가. 조심히 입안에 커피를 머금었다. 그리고 이 가게엔 에스프레소머신이 없음을 확신했다. 드립커피도 아닌 것 같았다. 항의하고 싶었다. 물론 하지는 못했다. 커피를 다 마실 때 쯤 '나도 물통 하나에 커피를 타서 마시면서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 중 하나는 해외에서 물은 되도록 생수를 사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나라의 물에는 석회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성분이 우리나라 물과 달라서 끓이지 않고 그냥 마시면 설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다. 커피가루를 물에 타서 줬을 어제 저녁 그 아메리카노가 원인이었던 것이다. 라고 나는 강력하게 추측했다.
현지에서 샀던 거친 질감의 두루마리 휴지 대신 쓸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았던 물티슈를 배낭 구석에서 꺼냈다. 난 소중하니까. 사실 여행 준비중에 물티슈를 챙길 생각은 없었다. 갓난아기를 키우는 동생이 조카를 위해 사용하던 물티슈에서 화학성분이 검출됐다고 화내면서 새 물티슈를 사서 잔뜩 남았다며 챙겨준 물티슈였다.
설정
트랙백
댓글
글
3
다른 곳에 비해 바라나시에 대한 정보는 비교적 얻기 쉽다. 그만큼 많은 여행자들이 머물고 가는 곳이다. 꽤 많은 사람들에 의해 검증된 라씨가게를 찾아 골목들을 헤맸다. 심심치 않게 한글로 된 간판들도 보였다. 마침내 『블루라ㅅ시 숍』이라고 쓰인 간판을 찾았다. 사장님이 쌍시옷 쓰는 법을 잘 모르셨나보다. 화살표를 따라 작은 골목에 들어섰다. ‘블루 라씨’에 도착했다. 파란색 문과 벽의 허름한 가게였다. 콧수염을 깔끔하게 기른 아저씨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라씨를 만들고 있었다. 좁은 내부에는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인구밀도를 높이고 있었다. 벽을 바라보는 자리에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이제 주문을 어떻게 해야 되나 두리번거리고 있었더니 옆에 앉아있던 외국인이 메뉴판을 넘겨주었다. 플레인부터 각종 과일 라씨가 있었다. 직원을 불러 블루베리 라씨를 주문하고 지폐를 건넸다. 벽에는 낙서된 종이와 온갖 인종의 여권사진들이 빽빽이 붙어있었다. 찬찬히 보면서 사진을 찍다보니 직원이 주문한 블루베리 라씨와 거스름돈을 주었다. 글로만 보던 라씨가 눈앞에 나타났다. 라씨란 요거트를 말한다. 아무리 부유해도 뚜껑은 핥는다는 그 떠먹는 요거트. 황토색 그릇에 담긴 연보라색 요거트 중앙에는 흰 색의 덩어리가 섬처럼 떠있었고, 잘게 자른 푸른 잎들이 뿌려져있었다. 한쪽에는 예전에 떠먹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따로 카운터에서 챙겨야 했던 나무숟가락이 푹 담겨있었다. 한 입을 입에 넣었다. 평범한 블루베리 맛인데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흰 색 덩어리는 고소하기도 하면서 텁텁하기도 한 맛이 났다. 찾아보니 커드였다. 우유에 산을 더했을 때 응고된다는 커드는 치즈와 버터 두 가지 느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뿌려져있는 작은 잎들도 나쁘지 않은 향을 가지고 있었다. 방금 전에 진짜 과일을 넣어서 만든 요거트를 먹는다는 느낌까지 더해져서 숟가락을 놓고 막걸리 마시듯 후루룩 입에 부었다. 인도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좀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중력을 이용하여 남은 라씨의 흔적들을 한 곳에 모으고 있는데 갑자기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눈높이를 맞추니 그 그릇은 흙으로 만든 질그릇이었다. 가게의 오래된 전통을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로 엔틱한 느낌의 그릇을 사용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 그릇을 사용하는 건지 조금 긴가민가했다. 바라나시에 있는 동안 이곳에는 자주 와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릇을 반납하기 위해 들고 문으로 나섰다. 문 앞에 서서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난 그릇을 한 번, 직원의 눈을 한 번 바라봤다. 직원이 집게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그 곳 바닥에 위치한 쓰레기통에는 질그릇들이 부서져있었다. 그랬다. 이 흙으로 만든 그릇은 일회용 그릇이었다. 마치 우리나라 카페 쓰레기통에 가득 찬 테이크아웃용 컵처럼 질그릇조각들이 가득 있었다. 얘네 들은 그래도 수백 년 동안 땅속에서 썩지 않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며칠이지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느꼈던 점이 있었다. 이곳은 공산품이 비싸다. 아마도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사람이 만든 물건들보다 오히려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이 비싼 것 일거다. 라씨를 먹고 나오는 손님들이 능숙하게 쓰레기통으로 그릇들을 던졌다.
설정
트랙백
댓글
글
2
배낭을 메고 바라나시의 복잡한 골목길을 걷다보면 다양한 호객꾼들이 말을 건다. 무시하는 게 보통이지만, 나는 아주 가까우며 깨끗하고 갠지스 강이 보인다는 호스텔을 소개해주겠다는 노인을 따라 걸었다. 그 가깝다는 호스텔에 언제 도착하냐는 물음에 ‘조금만 더’ 라는 대답을 몇 번 들었을 때쯤, 실을 풀어놓거나 빵을 조금씩 뜯어서 바닥에 떨어트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솟아났다. 이정도면 납치가 아닐까 의심이 들 때쯤 숙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로비‘만’ 깨끗했고, 당연히 싼 방에서는 강이 보이지 않았다. 강쯤이야 나가서 보면 되기 때문에 창문 없는 가장 저렴한 방을 택해 짐을 풀었다. 자물쇠로 단단히 문을 봉인한 후 숙소를 나섰다. 최대한 직진을 하는 방향으로 온 정신을 집중하여 가는 길을 기억해뒀다.
마침내 도착한 가트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주변 파악을 한 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앞엔 강 위에 배를 타고 흘러가는 사람들, 연 날리는 연습하는 꼬맹이, 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짜이를 파는 소년, 나처럼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여행객, 액세서리를 펼쳐놓고 손님이 관심을 보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하나같이 바빠 보이지 않았다. 조그만 백팩을 배게 삼아 누웠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스포츠타월로 얼굴을 덮었다. 분명 3인칭으로 관찰하면 여유로운 장면이었을 텐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고 신성하다는 갠지스 강을 바라봤다. 내가 알아본 바, 많은 인도사람들은 죽어서 화장을 한 후 갠지스강에 뿌려지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래서 화장터가 있는 가트들이 많다. 불을 피우는 데에 쓰이는 나무도 등급이 있어서 가난한 어떤 사람은 미쳐 다 태우지 못한 시신을 그대로 강으로 띄워 보낸다고 한다. 그래서 화장터에 가면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나무 값을 내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나는 그들의 삶이나 그들의 신에 대해 알려고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느끼는 이 강의 신성함에 동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죽음이 침잠한 그 강이 단순한 상류에서 하류를 향하는 물의 흐름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