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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웠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추웠다. 침낭에서 손을 꺼내 이불을 걷었다. 번데기가 탈피하듯 침낭의 지퍼를 내려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패딩 때문에 몸이 둔했다. 엉덩이를 이용해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침대 밖으로 발을 겨우 디뎠다. 바닥에는 싸구려 카펫이 깔려있었다. 나무로 된 창문을 열어보니 바깥 풍경이 보였다. 모처럼만에 괜찮은 풍경이 보였다. 언덕 아래 낮은 집들의 옥상과 안개가 그야말로 자연스러웠다. 돈 좀 쓴 보람이 있었다. 발품을 꽤나 팔았음에도 빈 객실이 없거나 비싸다는 이유로 언덕을 조금씩 올라와 광장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다. 그래봐야 만 원 정도밖에 안하지만 그동안 지냈던 숙소들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가격이다. 방은 깔끔했고 심지어 텔레비전도 있었다. 밤새 텁텁해진 입안을 양치로 정화시키고 본격적으로 씻기 위해 카운터로 갔다. 왜 카운터로 갔느냐고?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하면 십 분 정도 후에 양동이로 가져다주는 시스템이다. 보통의 경우에 비싸다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싸다는 것은 불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기꺼이 숙박비를 줄이기 위해 제한된 뜨거운 물을 십 분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생각해보면 프랜차이즈 커피 한 잔 마실 돈이면 훨씬 편해질 수 있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화장실의 요상한 구조상 변기가 그 방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아직도 수분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는 대장 덕에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려야 했다. 화장실에 쪼그려 앉을 때면 뭔가 굉장히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높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변기 옆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왔다. 굉장히 차가운 물이었다. 대야에 직원이 가져다준 양동이의 물과 찬물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머리도 얼굴도 발도 씻었다. 남은 물로는 빨래도 했다.
숙소 등급이 한 단계 정도 오르기는 했지만 아직 조식을 제공받는 수준은 아니었다. 운동화를 신었다. 그것으로 외출 준비는 끝이었다. 가방을 메고 찬찬히 언덕을 내려왔다. 동네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인사를 했다. 안녕 바부.
아침은 길거리에서 파는 모모를 먹었다. 만두다. 고기모모와 야채모모가 있었다. 우리나라와 똑같았다. 약간 향이 다른 것 외에는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새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간단한 표시로 고기가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과자에도 표시가 되어 있다. 초록색 동그라미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고, 빨간색 동그라미는 고기가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생수를 사러 가게에 들렀다가 초록색 동그라미가 있는 라면도 하나 샀다. 그리고는 부셔서 스프를 뿌렸다. 생라면을 집어먹으며 초우라스타광장 벤치에서 햇빛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 산책로를 걸었다. 노점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옷을 걸어두고 있었다. 나는 관심 있는 척 옷들을 구경하면서 떠나는 날 사겠노라며 아주 천천히 이동했다. 벤치에 앉았다가 누웠다가 노래도 들었다가 따라 부르기도 하니 안개가 걷히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더 이상 꼭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무감은 없었다.
산책로는 언덕을 빙 둘러 한 바퀴를 도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피부병에 걸린 개들과 각종 동물들의 배설물들이 부비트랩처럼 널려있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길은 깨끗했고 돌아다니는 개들도 멀쩡했다. 한가롭게 하품을 하며 누워있던 강아지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고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아!”
마음의 소리가 아니었다.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감탄사가! 나에게선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행동이다. 내 시선 끝에는 허공에, 그러니까 파란 하늘에 구름처럼 걸려있는 설산이 있었다. 안경을 벗어 티셔츠로 문질러 닦아 다시 썼다. 신기루도 아니고, 구름도 아니다. 파라마운트 배급 영화가 스크린에 걸린 듯 내 눈 앞에 눈 덮인 산이 걸려있었다. 멀리 있었기에 크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원근을 초월하는 크기의 그 존재에 압도되었다. 갑자기 마주친 산은 나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경외감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철저하게 이성적이라고 생각해왔던 내게서 애니미즘을 발견했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마구 찍었다. 확대해서도 찍어보고 온갖 설정들을 바꿔 찍어보았지만 담기지 않았다. 형태는 찍혔지만 내가 본 그 느낌은 담기지 않았다. 처음으로 있지도 않은 고급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나는 서둘러 산책로를 따라 이리 저리 자리를 옮기다가 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 칸첸중가가 내 앞에 있었다. 그렇게 벅차오른 상태로 나는 몇 시간동안 앉아서 계속 산을 바라봤다. 절경, 비경, 그림 같은 따위의 어떤 형용사로도 형용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를 이곳에 끌어들인 것은 홍차도 뭣도 아닌 칸첸중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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