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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어 방을 살펴본다. 벽과 천장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숙면을 취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나였기에 잠자리에 대한 까다로운 기준이 없었다. 이곳은 앱에서 찾은 빠하르간지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다. 침대가 있고, 화장실이 있다. “오케이, 땡큐.” 호스텔 주인이 문을 닫으며 나감과 동시에 긴장이 풀어진다. 들고 온 두 개의 가방을 침대에 던져놓고 화장실 문을 열어본다. 샤워기에 초록색 녹이 슬어있다. 혹시나 하고 물을 켜본다. 물이 나온다. 됐다. 이정도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역시 돈을 안전하게 두는 일이다. 적당한 금액을 나눈다. 여권, 카드와 금액이 큰 지폐는 복대에 넣는다. 유일한 길잡이가 될 아이폰이 혹여 꺼질까봐 충전기를 꽂아둔다. 그리고 미리 적어온 비밀번호로 가장 중요한 의식인 와이파이 연결을 마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음을 느끼자 바깥의 소음이 들려온다. 북소리, 아이들이 뛰어 노는 소리, 경적소리 등이 마치 바로 옆에서 나는 듯 생생하게 들려온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몸을 일으켜 화장실에 고개를 넣어봤다. 창문엔 창살만 덩그러니 박혀있었다. 괜찮다. 화장실 문을 꼭 닫지 뭐.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진짜 와버렸구나.’ 기분이 묘했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가이드북을 너무 자세히 보면 올 필요가 없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쩌면 부족할지도 모르는 최소한의 정보만 가지고 왔다. 당연히 말도 잘 통하지 않는다. 출국 전의 상황과 비슷했다. 장소만 바뀐 것이다. 깜깜해지니 노량진의 고시원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여느 때처럼 엄습해오는 우울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나가보자.’
로비에는 여전히 드레드머리 청년이 앉아서 강아지와 놀고 있었다. “할루.” 그의 인사에 난 어색한 미소로 답하며 손을 흔들고 문을 나섰다. 화장실 개방형 창문을 통해 들리던 그 소리들이 더욱 선명해졌다. 비좁은 골목엔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길바닥은 뻘이 흩뿌려진 듯 거뭇하고 질척거렸다. 왼쪽과 오른쪽의 갈림길에서 난 오른쪽을 선택했다. 왜 우리나라말도 미국말도 오른쪽은 옳을까?
조금 큰 길로 들어서니 길거리 상인들이 켜놓은 전등들로 환했다. 하지만 여전히 뿌옇다. 버리고 올 작정으로 신고 온 헬스장용 나이키 런닝화는 나와 달리 이미 현지 적응을 마친 듯 했다. 일단 나오기는 했는데 아무 욕구가 일어나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도, 어떤 것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수레에 과일을 올려놓고 파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렌지가 쌓여있었다. 얼마냐고 묻자 1킬로그램에 30루피라고 했다. '맙소사, 이렇게 싸도 되는 것인가.' 밀크 초콜릿 색깔의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와 콧수염을 가진 누가 봐도 인도인처럼 생긴 그 아저씨는 양팔저울 한 쪽 바구니에 오렌지를 담기 시작했다. 마치 경험이 많은 여행자인척 나는 단호하게 20루피를 외쳤다. 그는 알았다며 빠르게 비닐봉지에 오렌지를 담아주었다. 받아든 비닐봉지는 한국의 것과 질감이 조금 달랐다. 좀 더 야들야들한 느낌이랄까. 원가절감의 느낌이었다. 첫 흥정에 성공한 나는 조금 더 깎을 걸 아쉬워하며 거침없이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지 않았음에도 섣불리 새로운 것에 도전할 자신이 없었다. 마구 연기가 피워 오르는 노점 앞에 갔다. 양념된 닭다리를 숯불에 구워서 팔고 있었다. 치킨은 언제나 옳다는 신념대로 적당한 가격임을 확인 후 주문했다. 아저씨가 건네는 두 개의 일회용 접시엔 적당히 탄 닭다리 두개와 정체불명의 녹색 샐러드,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난이라 불리던 그 얇고 넓적한 빵이 놓여있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당연히 나무젓가락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사용해야 하는 손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계산은 선불인지 후불인지, 여기에 그릇을 둔 채로 먹어도 되는 것인지 판단해야 했다. 어차피 난 화장실에서 화장지를 쓸 건데도 상당히 고민되었다. 일단 돈을 건넸고, 오른손으로 닭다리를 집었다. 너무 뜨거워서 왼손으로 넘겼다. 결국 양손으로 닭다리를 잡고 한 입 뜯었다. 처음 경험하는 향이 입안을 휘감았다. 먹을 만했다. 아니, 참을만했다. 난 난을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재료 본연의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즉 밀가루 냄새가 입안을 맴돌았다. 약간 역함을 느끼며 샐러드를 오른손으로 조심히 모아 입에 넣었다. 역시 묘한 향이었다. 명도대비로 더욱 부각되는 주인아저씨의 눈은 나의 반응을 살피고 있어보였다. 눈웃음을 지으며 꼭꼭 씹어서 삼켰다. 다시 닭다리를 들었다. 분명 봤다. 뼈 가까이에 남아있는 핏물을. 나는 아니라고, 조명 때문이라고 최면을 걸며 두 개의 접시를 모두 비웠다. 종이와 플라스틱의 경계 어디쯤에 있을 질감의 티슈로 손과 입을 닦았다.
숙소에 들어오는 골목 앞에 묘한 튀김 빵을 파는 가게에서 1리터 용량의 생수를 샀다. 자물쇠를 따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비닐봉투에서 오렌지를 하나 꺼내서 깠다. 역시 따뜻한 곳이라 과일이 싸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사분의 일 쪽 정도를 떼어 입에 넣었다.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본능적으로 손바닥에 펼쳐 내용물을 확인했다. 씨다. 그렇다. 오렌지도 번식을 해야 할 테니 씨가 있는 건 몹시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먹어왔던 오렌지는 뭐였을까, 씨 없는 오렌지? 애초에 내가 지금 먹는 게 오렌지가 맞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당도는 조금 떨어졌고 과즙도 약간은 마른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가격이 싸다. 싸다면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다. 오렌지 하나에 씨가 한주먹씩 나오는 것쯤 큰 문제는 아니다.
불을 껐다. 완벽한 어둠이다. 하나의 감각이 닫히니 다른 것이 열린다. 책장 앞에 마구 떨어져있는 책처럼 미루어둔 생각들이 순서 없이 쏟아진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생각해본다.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든 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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