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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불편한 것들을 예의 있는 것으로 정했을까. 그는 잠기지 않는 셔츠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생각했다. 불편한 옷을 입었을 때 특유의 긴장감 때문인지 벌써 목이 끈적이는 것 같았다. 여러 번 조이기를 반복하다가 그는 짜증에 넥타이를 집어 던져버렸다. 침대 위 구겨진 이불 위에 넥타이가 떨어졌다. 한숨을 쉰 후 그는 다시 침대 위로 손을 뻗었다. 보호색을 띈 듯 넥타이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런 것 같았다. 내가 상대방을 위해 얼마나 불편함을 감수하는 지가 예절이었다. 서로 편하면 얼마나 좋을까. 입고 싶은 옷을 입으며, 하고 싶은 방식으로 표현을 하고 서로 상대방을 받아들인다. 생각만 해도 살만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인사의 예절은 특히나 복잡다단하다. 간단한 눈인사부터 시작해서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다.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는 절도 두 번이나 하지 않는가. 그리고 도대체가 우리나라 행사에 양복을 입고 다니는가. 차라리 한복이라면 내가 기꺼이 입을 텐데. 이어서 그에게 앞으로 있을 더욱 더 불편한 상황들이 떠올랐다. 터질 것 같은 기지바지의 허벅지를 보며 절 대신에 헌화를 고민했다. 결국 그는 단추를 잠그지 않고 넥타이를 대충 졸라맸다. 내 장례식장에선 절대로 양복 입은 사람은 입장시키지 말아야지.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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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but, 소박한 원고료의 소박함이란
안녕? 난 10년 후의 너야. 믿고 싶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물론 이 꿈이 깨고 나면 넌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어렴풋한 느낌만 남아도 충분히 성공이라고 생각해. 아니, 오히려 더 좋아. 평행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난 너지만 넌 내가 아니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너는 최대한 너의 개성을 유지하도록 해. 나도 그렇게 살았거든. 남에게 따라할 점을 배우기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세기는 방향으로 말이야. 그렇게 살았더니 이 꼴이 됐어.
어차피 기억 못할 테니 간단하게 말해주자면 넌 지금 입학한 4년제 대학을 8년 후에 졸업하게 될 거야. 무슨 개소리냐고? 진짜야. 뭐 딱히 건강상의 문제라던가 그런 심각한 문제는 아니고 다단계로 휴학 한 번, 실연의 아픔으로 인한 정체성 혼란으로 학교에 가지 않게 되어 학사경고 한 번, 광고회사를 만들겠다고 휴학 한 번, 신춘문예를 위해 휴학 한 번 하게 될 거야. 물론 사업이며 등단이며 성공한 건 하나도 없어. 혼란스럽겠지만 받아들여. 뭔가에 홀린 듯 빠르고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시작하게 되어있어.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이걸 이야기 하지 않았다면 그때의 그 숙명적인 느낌들이 없었을까?
다행인건 앞에서 이야기 한 몇몇 사소한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후회하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거야. 인생 선배로써 꿀팁을 하나 줄게. 학고장이 날아오기 전에 학교 홈페이지에서 주소를 바꿔두도록 해.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모르셔. 모두가 슬프지 않게 된 훌륭한 전략이었지. 그리고 기쁜 소식이 몇 가지 있어. 하나는 올해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럼 그동안은 돈을 안 벌었냐고? 응.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려고 하지 마. 조만간 바뀔 것 같으니까. 두 번째 기쁜 소식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인도에 작년에 다녀왔다는 거야.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왜냐하면 임용고시에 두 번 떨어졌거든. 근데 차라리 올해 다녀올걸 그랬어. 작년에 벌써 인도에 갔다 와서 올해는 그냥 한국에서 마음을 추슬러야 했으니까. 몇 가지 있다고 했는데 기억이 더 이상 나질 않는다. 뭐 그래도 지금까진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어.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꿈속에서 너를 찾게 된 데에는 하나 큰 이유가 있어. 그것은 바로 머리, 머리 때문이야. 헤드가 아니라 헤어. 지금 너는 타고난 모발은 얇지만 하나의 모공에서 머리카락이 두세 가닥 비집고 자랄 정도로 괜찮은 밀도의 건강한 두피를 지니고 있을 거야. 아, 지금 첫 호일 펌을 하고 있을 때인가? 내가 대여섯 번 해봐서 아는데, 그 한 번으로 만족하고 살도록 해. 다른 파마보다 훨씬 두피에 좋지 아니하단다. 너도 알다시피 너를 중심으로 친가 외가를 통틀어서 2대 내에 대머리인 식구는 존재하지 않잖아? 그리고 대머리는 한 대를 건너뛰어 유전이 된다고 알려져 있지. 우리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를 떠올려봐. 두 분 모두 굵고 빽빽한 머리숱을 가지고 계시잖아. 이쯤 되면 넌 머릿속에 반짝거리는 인물들의 몽타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굉장히 불안하겠지. 다행히도 대머리는 아니야. 하지만 명백한 탈모증상이 나타나는 중이야. 물론 갓 스무 살인 네가 이 불안을 어떻게 통감할 수 있겠냐마는 난 꼭 전해야겠어.
난 머리터럭에 너무 집착했어. 자르면 다시 자란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의 법칙이 내 머리털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믿었던 거지. 수많은 파마, 탈색과 염색을 통해 두피는 오염되어갔고,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진 모근들은 본격 이주준비를 시작했던 거야.
결정적인 한 사건은 훈련소에 입소하기 열흘 쯤 전이야. 난 흰머리가 하고 싶었고, 삼일에 걸쳐 천오백 원짜리 탈색약 여섯 개를 구입했지. 난 아저씨의 말을 좀 더 새겨들었어야 했어. 아저씨는 말했어. "그러다가 아저씨처럼 된다." 그는 선배 탈모인이었거든. 난 6일간 매일 탈색을 하기 시작했지. 두피가 화끈거리고 머리카락들이 부서졌어. 기대하던 흰머리가 되지는 못했지만 난 몹시 밝은 톤의 머리카락을 얻었어. 그렇게 나는 유니크한 머리색깔을 삼일정도 즐긴 후에 머리를 밀고 훈련소로 갔어. 이 모든 만행들은 자르면 다시 자랄 거라는 믿음에서 시작한 거야. 물론 다시 자랐어. 하지만 그 후에도 난 몇 번의 파마와 염색을 했어. 두피에 아포칼립스가 점점 다가오고 있던 거야.
어떤 병에는 이런 접두어가 붙어. '신경성'.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소리지.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소리도 있잖아? 자고 일어나면 거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타고난 무심함에도 노량진의 반복적인 수험생활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생성해냈어.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거울에서 동해바다를 봤어. 기억할거야. 가까운 대천이나 서천 바다만 봐오던 네가 동해바다에 처음 갔을 때 느꼈던 그 충격 말이야. "세상에나, 바닥이 보여." 그래. 머리와 머리를 갈라 가르마 사이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허연 두피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거야. 탈모란 놈은 그렇게 전희 없이 한순간에 나와 하나가 되었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대머리였다면 난 운명을 받아들였겠지. 하지만 난 타고난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저항하고 싶었어. 밝고 희망찬 생각들과 의식적인 웃음, 꾸준한 운동으로 몸과 마음을 점점 가꾸기 시작했어. 스트레스성 탈모의 무서움이 뭔 줄 알아?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어도 머리를 감을 때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을 보면 다시 스트레스가 생기는 거야. 그러면 머리카락은 다시 빠질 테고,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나는 다시 스트레스를 받겠지. 무한루프야. 답이 없지.
어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니? 다른 건 잊어도 괜찮아. 어떻게 살던 모든 삶엔 그마다의 너무 가치가 있어. 하지만 이건 다른 차원의 문제야. 꼭 기억해. 머리숱이 없다는 것은 노안으로써 훌륭한 충분조건을 갖추는 거야. 머리숱이 없다는 것은 그만한 자신감의 하락을 가져오기도 하지. ‘대머리 vs 고자 되기’의 유명한 난제가 있을 정도라니까. 탈모를 우습게 보지마. 적어도 서른 안에는 머리를 심는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거야. 비싸거든. 이번 생의 난 글렀어. 나의 목표는 비록 현상유지지만, 너만은 꼭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두피를 유지하여 건강하고 윤기 있는 모발을 유지하길 바라.
마지막으로 이야기할게. 돌이켜보면 참 재미있고 특별한 인생이야. 큰 걱정 하지 말고 꼴리는 대로 살아. 자외선 조심하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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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문화적 차이라는 건 어쩔 수 없나봐. 말하자면 최소한의 양심이랄까, 그런 이유로 너를 다시 마주볼 수 없었어. 내가 이야기했듯이 나는 우리 부족에서 유일하게 다른 도시에서 공부를 하고 온 사람이야. 몇몇이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부족 사람들은 다른 나라 말과 학문을 공부해온 나를 굉장히 신뢰해. 물론 너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 나는 아직도 궁금해. 네가 어느나라사람이었는지, 어떻게 하다가 이곳에 오게 된 건지. 우리가 말만 조금 통했더라도 나는 우리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너를 처음 본 건 이틀 전이었어. 목과 발에 족쇄가 채워진 채였지. 나는 그 순간 모든 상황을 이해했어. 오랜만이긴 했지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거든. 너는 내게 다급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했지. 너의 눈에서 난 희망을 봤어. 온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밖에서 입는 옷, 그러니까 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처음 봤을 테니까. 나는 이해해. 그때 족장님이,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알았더라면 너는 까무러쳤을 거야.
나는 지난 이틀간 네가 갇힌 창고로 가서 밥도 건네주고 이야기들도 들어 주었어. 다시 말하지만 네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던지, 아니면 내가 너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더라면 상황은 조금 나아질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전통문화라는 것은 그야말로 삶에 스며있는 것이야. 그래서 내 이야기는 전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어.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야만적인 행위로 보인다. 따위의 말들 말이야. 유학을 마친 내가 선물이라고 사온 바깥의 옷들을 아무도 입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그런데 식생활에 대한 것은 어떻겠어.
아버지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셨어. 오늘 아침에 네가 사라진 것을 보고 물었더니. 도망갔다. 하고 말하셨거든. 내가 너와 약간의 정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거지. 나는 믿지 않았지만 너를 찾지도 않았어. 일상이라는 것이 그렇잖아? 일상에 집중을 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여러 가지들을 잊게 되고.
그러고 보면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어. 내가 키우던 닭이라던가 돼지들은 어느 날 없어졌고, 하루 종일 그 아이들을 찾아다니던 나의 물음에 항상 아버지의 답은 같았어. 도망갔다.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였어. 오랜만에 맡는 익숙한 냄새가 났어. 네게 조금 미안하지만 그리운 냄새였지. 그리고 식탁엔 네가 있었어. 그리고 가족들이 너를 빙 둘러싼 채로 앉아있었지. 나는 먹지 않겠다며 밖으로 나왔어. 우린 구면이잖아.
밖을 걸었어. 맨 처음 족쇄에 구속되어 있는 네 앞에서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한 말씀이 떠올랐어. 맛있게 생겼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어. 너는 설마 지구상에 사람을 먹는 사람들이 남아있을거라 상상조차 못했겠지. 나도 그래. 어렸을 때부터 먹다보니까 사람을 먹지 않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걸 생각조차 못했지. 마을 밖에서 공부하기 전까지 말이야.
예전엔 뛰어난 전사나 지위가 높은 적들을 잡아먹었다고 해. 그러면 그들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거지. 선생님이 그 기운을 '마나' 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모를 이유로 같이 수업을 듣던 학생들이 웃어댔던 기억이 나.
지금은 예전처럼 전쟁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잖아. 그 수업처럼 요즘은 마나를 흡수하려고 사람을 먹지 않아. 심지어 부족사람들 모두 마나가 뭔지도 모르지.
마을엔 온통 네 냄새가 가득해. 그리운 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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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사실 네 이름이 진영이었는지, 진형이었는지 확실히 기억이 나질 않아. 그래도 네가 충분히 이해 할 거라고 믿어. 우리가 헤어진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한 번 찾아봤는데 역시나 네 이름은 없더라고. 아마 6학년 때 전학을 갔던 것으로 기억해. 아까 점심때 아빠랑 같이 염소고기를 먹으러 갔었어. 먹어본 적도 없고, 먹을 생각도 없었거든. 다른 메뉴도 있다고 나를 꾀어서 아빠를 따라갔었는데 탕, 전골, 구이밖에 없었어. 그래서 생전 처음 염소라는 걸 먹어봤지. 나름 나쁘지 않더라고. 심리적인 위축은 있었지만 맛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괜찮은 쪽에 가까웠다고 할까.
아, 미안 이야기가 조금 샜다. 염소고기를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 식당이 저수지 근처였거든. 기억나지? 그 저수지.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 쪽으로 가파른 언덕을 지나야 하잖아. 그 좁은 시골길을 지나가던 중에 갑자기 네 생각이 난거야. 네가 살던 집이 보였거든. 그래서 내가 아빠한테 말했었어. 저기 예전에 내 친구가 살던 곳이라고. 초등학교 때 그 친구가 전학을 갔노라고. 그런데 아빠가 다짜고짜 욕을 했어. 미리 양해를 구할게. 굳이 그대로 적을 필요는 없지만 내가 그러고 싶어. 아빠가 뭐라고 했냐면, “개새끼. 지 새끼는 버려버리고.” 라고 했어. 이 일성이 내게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하게 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차를 타고 울퉁불퉁하고 고부라진 길들을 오는 동안 너는 한없이 불쌍한 아이가 되었어. 그리고 너와 있었던 일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지. 보통 하나 둘씩이라고 하면 둘보다 많아야 하는데 사실은 딱 두 가지가 떠올랐어.
하나는 우리가 같은 판타지 소설을 열광적으로 읽었었다는 사실이야. HOT나 젝스키스를 좋아하던 친구들과는 달리 우리는 소설책속의 마법과 용에 대해 열광했었어.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그때 이후로 나는 너를 외면했어. 너는 기억할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보다 그 순간은 생생히 떠올라.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최근에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라는 책을 봤어. 신경장애 환자들의 실제 일화들을 기록한 글이야. 기록이라고 하면 다소 딱딱한 감이 있지만 굉장히 문학적인 표현과 비유들이 등장해. 어쨌든, 여러 가지 글 중에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어떠한 뇌신경의 문제로 대상이 두드러진 특징이 없다면 구분을 할 수 없게 된 남자의 이야기야.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 남자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해서 아내의 머리를 손으로 집어다가 자신의 머리 쪽으로 끌어당겼다고 해. 이 남자의 증상이라던가를 묘사하는 부분 중에 예전에 있던 일들을 기억하는데 대부분을 장면 없이 텍스트로만 기억을 한다는 내용이 있어. 사실 방금 이 내용이 확실한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어쨌든 그렇다고 하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도 기억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그렇기 때문이야. 조금 잘못된 점이 있더라고 네가 좀 이해를 해주길 바란다는 뜻이야.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우리가 좋아하던 소설의 다음 권이 나올 때쯤이었어. 항상 내가 책을 사고 다 보고나면 너에게 빌려주는 식이었어. 그런데 어느 날 너는 내게 다음 권을 봤다고 하면서 자신이 본 내용을 이야기해줬지. 지금은 스포일러라면 치를 떠는데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나봐. 나는 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생하게 그 장면들을 상상했어. 브레스를 내뿜는 드래곤, 무너지는 탑, 조금씩 무너지는 악당. 그 희열이 아직도 생각나. 네 시선으로 나는 다음 내용을 기다리며 눈을 반짝이는 귀여운 여자아이였을까?
문제는 바로 그 다음이야. 너는 내게 다 거짓말이었다며 웃었고, 나는 속았다는 사실에 더없는 분노가 일었어. 그날로 끝. 그래서 난 네 이름도, 전학을 언제 갔는지도 잘 기억을 못하나봐.
두 번째 기억으로 넘어가자. 두 번째 기억은, 사실은 첫 번째 기억보다 더 앞의 일이지만 네가 민망할까봐 늦게 이야기 하는 거야. 내가 너희 집에 가서 잤던 날 기억해? 요즘 아이들은 인터넷도 거의 태어나자마자 다루는 수준이니까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어서 그럴 일이 없겠지만 어쨌든 그랬었어. 그래. 내가 너희 집에 가서 잤었지. 그것도 네 옆에서.
그때는 모든 걸 잘 몰랐을 때였어. 가난이라던가 하는 부분도 말이야. 그냥 나는 네 집은 이렇구나 하고 생각했었지. 높이 쌓여 있는 종이박스, 철로 된 고물들. 삐거덕거리는 바닥, 비좁은 공간들. 우리는 컴퓨터로 너구리 게임을 했어. 그러다가 날이 어두워졌고, 산길을 걸어 올라가기에는 조금 무서웠던 것 같아. 난 집으로 전화를 해서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허락을 받았겠지. 이 부분은 잘 기억이 안나. 기억이 나는 부분은 내가 잠든 이후의 일이야. 내가 자다가 깼을 때 아니, 네가 날 깨웠을 때. 그래. 너는 몰랐겠지만 나는 그 때 잠에서 깼었어. 그 다음 장면. 옆으로 누워있는 내 뒤에 붙어서 한 손으로는 내 가슴을, 다른 한 손은 네 팬티 속을 만지는 너. 웃긴 건 난 그때 아무렇지 않았어. 앞에서 말했듯이 난 모든 걸 잘 몰랐거든. 그래서 그냥 다시 잠들었어. 나중에서야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깨달았지만 그때는 분노라던가 수치심보다 다른 감정이 솟아올랐어. 이 이야기를 하려면 또 다른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아.
네가 전학을 가고 한참 후의 이야기야. 중학교 2학년쯤으로 기억해. 어떤 친구가 뜬금없이 네 이야기를 했어. 인천으로 전학 간 네가 게이가 되었다고. 정말 웃기지 않니? 동창 중에서 친구라고는 아무도 없던 너의 소식을 누가 가져왔으며, 정말로 네가 게이가 되었다고 해도 그걸 어떻게 알아서 그런 이야기가 떠돌았던 걸까. 어쨌든 그 이야기는 정말 잠시 동안만 회자가 됐어. 친구들의 반응은 걔가 누군데? 또는 아 정말? 정도였어. 라이터 부싯돌을 굴리면 잠시 반짝거리는 그런 느낌이었어. 하지만 나는 그게 도화선이 되어서 내가 이야기한 이 두 번째 장면이 기억난 거야. 그쯤 나는 친구들보다 좀 늦은 초경을 시작했고 사춘기도 시작됐었지. 너는 이따금씩 기억 속에서 툭하고 튀어나오곤 했어. 내 가슴을 만진 게이로.
그러고 보면 훌륭한 작품을 남기는 창작자 중에는 동성애자가 많다고 들었어. 내 생각에는 이래. 동성애자는 아이를 남길 수 없잖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긴다는 것은 DNA안에 깊게 새겨진 거부할 수 없는 명령 같은 거라고. 그래서 남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에 막 뿌리고 다니잖아. 갑자기 어떤 새끼가 떠오른다. 아무튼 게이는 자신의 유전자 대신 작품을 남기는 거지. ‘자식’같은 작품들 말이야. 거기에 자기의 소외감이랄까. 그런 감정들에서 그런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것 같아. 네가 열심히 떠들던 그 소설의 다음 이야기가 그렇게 실감나고 재미있던 것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
아, 별것 아닌 이야기로 꽤나 오래 끌었다. 진형이 아니, 진영이었나? 어쨌든 네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여전히 고물과 폐지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그 곳에 계신 분이 너희 아버지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 아버지가 너를 정말로 버리신 건지 모르지만. 또 네가 정말로 중학교 때 동성애자가 되어서 가난하고 차별받는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지만 너라면 훌륭한 작가, 또는 훌륭한 게이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 둘 다이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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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많이 읽었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다니던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다. 한 학년에 한 반 서른 명이 전부였던 작은 시골초등학교였다. 항상 무언가 읽고 있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에서도, 심지어 등굣길에 걸어가며 책을 읽다가 구름사다리에 이마를 부딪친 적도 있었다. 내가 살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책을 사려면 버스를 타고 읍내에 나가야했다. 그 당시에도 나름 마일리지 시스템이 있었다. 책 한권을 사면 종이에 도장을 찍어서 손바닥만한 종이 한 면을 다 채우면 책 한 권을 공짜로 가질 수 있었다. 꽤 많은 책을 책을 공짜로 얻었을 때쯤, 친구가 엄청난 정보를 알려줬다. 도서 대여점에 가면 책을 빌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화책, 소설책, 비디오까지. 이후로 난 책을 더 많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로 온라인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에 이천 원을 주고 PC방에 다녔다. 집에 와서는 모뎀으로 인터넷에 접속해서 게임을 했다. 글자만 있으면 무조건 읽어대던 전과는 달리 판타지 소설만 읽었다. 용과 마법과 몬스터.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책에 몇 쪽 썼던 것 같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었다. 그쪽이 더 좋았다.
고등학생이 되니 게임을 할 방법이 없었다. 야자가 끝나면 기숙사에 들어가야 했다. 나는 무협지와 판타지 소설로 느린 시간에 채찍질을 했다. 물론 공부도 했다. 두 명의 친구와 함께 문학 동아리를 만들었다. 인원은 세 명이었으며, 졸업할 때까지 세 명이었고, 졸업 후에는 0명이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독서도 졸업했다. 몰랐던 놀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당구도 배우고 화투도 배웠다. 철권 고수가 되기 위해 틈만 나면 오락실에 살았다. 고백을 했다가 실패했고, 담배도 피우게 됐다. 연애도 했고, 헤어짐도 겪었다. 선천적으로 언어유희를 좋아하던 나는 틈만 나면 짧은 문장들을 싸이월드 게시판에 적어두곤 했다.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는 어떤 균열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게 첫 균열은 첫 헤어짐이었다. 복잡했다. 어찌할 줄을 몰라서 가사를 썼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비트에 가사를 얹는 법을 배웠다. 녹음했다. 나름 재밌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게 취미가 됐다. 짧지만 의미 있게, 그리고 각운을 맞춰 글을 쓰고 녹음을 한다. 멋진 경험이었다.
몇 년이 흘러 나는 신춘문예에 글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끝내주는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일찍 떨어지는 계절에 나는 매일 저녁 카페에 가서 글을 썼다. 단편소설이었다. 분량이 안 나와서 붙일 수 있는 미사여구를 다 가져다가 붙였고, 필요 없는 접속사들을 총동원했다. 분량을 겨우 맞추고는 뿌듯해하며 우편을 보냈다. 어느 신문사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연락은 없다.
또다시 몇 년이 흘렀고, 난 노량진의 흔한 수험생이었다. 정확히 12월 31일. 아침에 혼자 조조영화로 변호인을 봤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준통곡을 하고 눈 주위는 벌겋게 부은 채로 용산역에서 노량진역에 왔다. 그 날은 내가 정한 맘껏 쉬는 날이었다. 서점엘 갔다. 좋은 책 한 권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요량이었다. 매대에 누워있는 뻘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부터가 매력적이었다. ‘살인자의 기억법’ 나는 책을 고를 때, 제목과 목차, 작가의 말만 읽어보고 고른다.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 나는 이 책을 고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말을 봤을 뿐인데 무언가 전율을 느꼈다. 그대로 옮긴다면 이렇다.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어린아이가 레고를 가지고 놀 듯이 한 세계를 내 맘대로 만들었다가 다시 부수는, 그런 재미난 놀이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중략) 소설가라는 존재는 의외로 자율성이 적다. 첫 문장을 쓰면 그 문장에 지배되고, 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을 따라야 한다. 소설이 끝에 도달하면 작가의 자율성은 0에 수렴한다. 마지막 문장은 앞에 써놓은 그 어떤 문장에도 위배되지 않을 문장이어야 한다. (후략)
카페에 가서 책을 폈다.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글을 너무나도 잘 썼다. 그 전에 책을 읽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영화였다면 영상미가, 음악이었다면 연주가 끝내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야기 외의 것에 아름다움과 흥미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책을 다 읽은 후에야 작가 이름을 봤다. 김영하. 사진도 있었다. 왠지 카페 사장님처럼 생긴 아저씨였다. 나는 그 날 이후로 몇 달에 걸쳐 김영하작가의 책을 모조리 사서 봤다. 도무지 읽히지 않는 산문집 한 권만 빼고(웃긴 점은 그 책의 이름은 읽다). 다양한 화자, 다양한 주제, 다양한 시점과 표현들을 보고 있자면 눈을 뗄 수 없었다. 질투가 났다. 나도 그렇게 잘 쓰고 싶었다.
이전처럼 몇 줄보다는 길지만 한 페이지가 될까 말까 하는 글들을 틈만 나면 썼다. 대부분 일기였지만 화자를 바꾸고, 시점을 3인칭으로 바꿨고, 추상화시켜서 사건을 아예 묻어두기도 했다. 자주 쓰다 보니 몇 가지 이야기들도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뼈대를 만들고 나서도 번번이 실패했다. 긴 글을 쓸 수 없었다. 단거리 연습만 하다가 마라톤을 도전하는 느낌이랄까. 호흡을 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에세이를 쓰기로 했다. 마침 인도 여행을 다녀왔으니 주제는 적절했다. 100미터 달리기를 422번 끊어서 하면 풀코스 마라톤이니까. 이것이 나의 첫 글쓰기 미션이다.
벌써 첫 에피소드를 쓴 후로 한 달 정도 지났지만 반도 못 쓴 것 같다. 쓰고 싶은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많았다. 쓰고 나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워버리기도 하고, 대충 쓰고 그냥 올려버리기도 했다. 조금 처지는 감이 있지만 써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랴.
휴대폰 메모장에 차곡차곡 자위하듯 혼자 써놓고 좋아하는 단계를 지나, 이제는 노출증 환자가 되어 벌거벗고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기왕이면 좋은 물건을 내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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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에 어떤 일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남들이 철밥통이라 부르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전문성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친구, 사업을 시작했는데 자신이 그 분야에 꽤나 알려져 있어서 일이 너무 많아 잠 잘 시간이 몇시간 없다는 친구. 그들에 반해 나의 처지가 초라했다. 단순 노동 뒤에 겨우 남는 시간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누군가 그랬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라고. 나는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모든 것들에 대해 의연하게 대했다. 좌절에 동요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기쁨에 몰입하지 않았다. 안경 대신 쌍안경을 쓴 것처럼 가까운 곳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덧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내가 득도를 했거나 해탈을 한 줄로만 알았다. 항상 계획표의 가로 일곱 칸이 모두 채워지지 않으면 불안했던 예전과 달리 계획에 칸이 없었다. 단지 언젠가, 라는 단서가 달려 있는 추상적 목록 뿐이었다.
저 생각이 떠오르고 난 후, 친구들이 멋져보였다. '전문가'라는 작위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명예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시간과 노력과 고민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 각자의 방향으로 뛴다. 선생님이 되기 위해, 성공한 사업가가 되기 위해, 최고의 기술자가 되기 위해. 방향이 달라서 목적지도 다르다. 얻는것도 다르다. 따라서 시기심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지그재그로 뛰었다.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또 다른 방향으로 뛰며 외쳤다. "난 온갖 경험을 다 할거야!!"
로버트 프로스트는 그의 시 '가지 않은 길'에서 이야기했다. 길은 길로 이어져있다고. 내 '온갖' 경험에는 길 뒤에 이어진 다른 길은 없었다. 다시 돌아와서 다른 길로 걸었기 때문에. 십 년전에 읽었던 시가 갑자기 내게 말했다. 같은 방향의 다른 길도 있다고. 그리고 프로스트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말했다.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시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통찰을 준다. 나의 지그재그의 길도 어쩌면 나만이 걸었던 새 길인가 싶다. 사실 이 길의 방향은 알 것 같다. 걷다 보면 모든 것이 달라질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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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진탕 마신 술 그리고 서너시간 남짓의 수면으로 피곤함이 표정에 깃든 그는 대충 모자를 눌러 쓰고, 한 손엔 우산을 들고 있었다.
오른쪽 양말이 점점 말려 내려가고, 빗방울이 그의 아킬레스건을 때리는것을 느끼며 계속 걸었다. 이렇게나 정확하게 동선을 파악하며 집으로 가고 있다니, 사실 정신이 말짱한건지 본능이 그를 조종하는지 그는 궁금했다.
좁은 골목이 나왔다. 그는 왼쪽으로 가야했다. 그리고 왼쪽으로 꺾었다. 몸은 왼쪽으로 향했고 고개 또한 왼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오른쪽에 고정되었다.
그의 시야에서 그녀가 사라졌다. 이제 그녀의 앞에, 아니 그녀와 어떤 남자의 앞에 그가 걷는 형국이 되었다.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날 알아봤을까?'였고, 따라서 드는 생각은 '저 남잔 누구지?' 이어서 왜 같이 우산을 쓰고 있는건지, 그녀가 어제 술약속이 있다고 이야기한 사실을 떠올리는것으로 이어졌다.
다시 그는 오른쪽 골목 언덕으로 올라갔다. 한 오미터쯤 올라갔을까. 그는 갑자기 숙취를 느꼈다. 다시 돌아 내려갔다. 이제 그의 앞에 그녀와 다른 남자가 걷는 모양이 되었다.
키가 좀 커보이는 남자가 들고있는 우산은 그들을 다 가려줄 수 없어보였다. 해서 남자의 왼쪽 어깨가 젖었을 것이다. 그녀는 날씨가 추웠는지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는 무채색의 공간속에 그녀만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걸 느꼈다. 그는 속이 더 쓰려오는걸 느꼈다. 그들이 카페앞에 멈춰섰다. 그는 걷는 속도를 늦췄다. 그녀가 들어가고, 남자는 우산을 접고 따라 들어갔다. 남자의 오른쪽 어깨에는 그녀의 가방이 메어있었다.
"씨발"
그는 계속 걸었다. 금방 다른 카페가 나왔다. 우산을 접었다. 우산살 하나가 어긋나있었다.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는 이내 샷추가를 요구하고 기다렸다. 그는 이어폰과 닿아있는 귀 부분에서 두근거림을 느꼈다. 두근거림은 관자놀이까지 이어졌다.
금새 나온 커피를 휙 돌렸다. 얼음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크레마가 흩어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차갑고 찝질한 커피를 입에 가득 머금었다. 목으로 위로 차가운 커피가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이내 속이 다시 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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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해요. 남자친구랑 먹어야 될 것 같아요.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한순간에 너무 많은 정보가 다가왔다. 그녀의 볼에는 빨갛게 피부 트러블이 생겼으며, 그녀는 핸드폰 케이스를 바꿨다. 방금 한 약속을 취소할 만큼 그녀에게 나의 우선순위는 하위권이며, 그녀는 남자친구가 생겼다. 남자친구가 생겼다.
- 아, 그래? 남자친구는 언제 생겼어?
병신.
- 한 달 좀 지난것 같아요.
왜 얘기 안했어? 아니, 얘기 할 필요가 없었겠군. 순간 내 표정이 얼마나 썩었을지 상상이 안됐다. 뭐라고 마무리 지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대화. 남편이 있던 것보단 낫잖아? 따위의 자기 개그는 먹히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이어폰을 꽂았다. 빠른 드럼 비트에 심장박동이 묻혔다. 성도 이름도 나이도 생김새도 모르는 남자새끼한테 패배감을 느꼈다가, 이제 좀 선이 그어진건가 하는 시원함과 나 자신의 집착에 대한 해방감, 교묘하고 교활한 저 첫 대사에 대한 섭섭함이 뒤섞였다. 담배 연기 탓인지 식욕이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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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마르지 못한 아스팔트의 검버섯을 피해 밟으며 케이는 언덕을 오른다. 몇 개의 고시원과 몇 개의 원룸 건물을 거쳐 노란 빛이 방사되는 가로등 밑에 선다. 케이는 점심 때 잠깐 외엔 필요가 없어진 삼단우산을 지탱하고 있는 새끼손가락에 부담을 느낀다. 우산을 버리듯 바닥에 툭. 그리고 트레이닝 바지에서 담배를 꺼낸다. 라이터가 집히질 않음을 느낀 케이의 왼손은 왼쪽 주머니를 수색한다. 내일은 꼭 라이터 사야지. 라고 되뇌이며 몇 번 헛손질을 한다. 엄지 마디가 약간 쓰림을 느낀다. 부싯돌 긁히는 내음과 함께 생명력 없어 보이는 불꽃이 나타난다. 왼손으로 조심히 바람을 가리고 케이의 흰 주둥이가 불꽃을 마신다. 한 차례 비로 교통체증을 겪었을 담배꽁초들이 엉겨있는 맨홀 뚜껑 근처에 쪼그려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고시원에서 사람이 나와 케이의 옆에서 담뱃불을 붙인다. 케이는 쪼그려 앉은 자신이 혹여 그와 같은 고시생활에 찌든 패잔병처럼 비추어질까 우산을 새끼손가락에 걸고 일어선다. 담뱃똥를 손가락으로 퉁기고는 고시원으로 들어선다. 뒷꿈치를 살살 비벼 신발을 벗고 신발장에 넣는다. 들키면 안되는 양 뒷꿈치를 사용하지 않고 좁은 복도를 지나 조심히 문 앞에 선다. 110이라고 적혀있는-그마저도 헤져있다-견출지가 붙어있는 열쇠를 꽂고 툭 돌리고 방문을 연다. 비가 와서 오랜만에 운동화를 신었더니 발이 답답한 케이는 양말을 대충 뒤집어 벗어서는 빨래 바구니에 던져넣는다. 침대 위에 걷어놓은 빨래들을 들어 의자 위에 얹어놓는다. 아슬히 균형을 잡은 직물더미의 맨 아래는 두꺼운 점퍼가 있고 점점 위쪽으로 갈수록 얇고 짧은 옷이 자리잡고있다. 케이는 내일은 꼭 옷정리 해야지. 라고 되뇌이며 전기장판이 깔려있는 침대 위에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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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는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운다. 네 발과 꼬리, 두 귀와 얼굴이 검은 바닐라 색의 암컷 샴이다. 여느 고양이가 그렇듯 항상 우아한 자세로 걷고 도도함을 잃지 않는다.
고양이의 이름은 이명. 분양받기 위해 처음 이명을 봤을때, 제이는 귀에서 삐-하는 소리를 느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작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을때 제이의 다리 주위로 몸을 부비는 이명은 제이의 일상의 유일한 즐거움이 되었다.
고양이는 지능이 꽤나 높아서 사람말을 잘 알아듣는다고 한다. 단지 무시할뿐이라 반응을 안하는 것 뿐이라고. 제이는 이명을 길들이고 싶었다. 해서 간식으로 이것저것 유혹을 해보는 등 숱한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이명은 휙 돌아 관심을 끊고는 포기한 제이가 놓아둔 간식을 먹고는 했다.
제이의 일상이 바뀌었다. 매일 이명을 위한 간식과 장난감등을 찾았다. 제이의 작은 공간 벽면엔 붙박이 캣타워들이 가득했고 주말에 환기라도 시키려고 창문을 열면 수많은 고양이 털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온 집안을 부유했다. 작년에 중고 매물을 찾아 싼 값에 들여놓은 소파는 여기저기가 찢겨져 너덜거렸다. 이명의 놀잇감이었을 두루마리 휴지도 처참하게 찢겨져 널부러져있기 일쑤였다.
제이는 꾸준히 이명을 훈련시켰다. 훈련의 성과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제 겨우 명아-하고 부르면 갸옹 하고 대답하는 정도였다.
한 해에 세 번있는 시험날의 아침. 제이는 여느날의 아침처럼 이명을 불렀다. 하지만 이명은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놀란 제이는 그 날 고사장 대신 동물 병원을 다녀왔다. 기운을 되찾은 이명은 우아하게 제이의 무릎에서 뛰어내려서 자신의 장소로 가버렸다. 제이는 서운함을 느꼈다. 제이가 명아-하고 열 번쯤 부르니 한 번 대답해주었다. 그 한 번의 대답에 제이의 서운한 마음이 녹아내렸다.
제이는 스마트폰의 사진첩을 연다. 이명과의 첫 만남부터 방금전까지의 사진을 찬찬히 살펴본다. 기분 좋은 얼굴을 한 제이는 말한다.
"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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