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짧글 2016. 5. 19. 01:39

[ 점심 함께 해요 !! ]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혼자 먹는 밥은 제 아무리 7첩, 12첩, 수라상이 아니라 수라상 할애비라도 맛이 없다. 연식이 좀 된 아이폰. 적당한 짜증을 유발하는 느린 반응에도 한자 한자 눌러 답장을 했다.

참 맑은 하늘에 좋은 햇빛. 아, 땡땡이 치기 좋은 날씨다.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몸짓으로 인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옆에 서서 걸었다. 금새 통화를 마친 그녀가 물었다.

- 뭐 먹을지 생각해 봤어요?

물론 안해봤다. 아까 맥도날드에서 메세지가 왔던데, 맥런치를 먹고 폭스바겐 티구안을 받았단다. 누군지 좋겠다. 헛소리는 역시 삼키는게 제일이다.

- 아니, 너는?

-별로 생각 안해봤는데요. 저 쪽 3번 출구쪽에 설렁탕과 갈비탕 파는 곳이랑, 그 근처에 스테이크집이 있구요, 저어 쪽에 돈가스. 조금 멀긴한데, 한정식집이 있는데 정갈하게 잘 나와요.

별로 생각 안해봤다더니 '일단' 네 곳을 제시한다. 생각을 더 하게 했다가 닥칠 수많은 선택지들과 그것들이 줄 곤란함이 스쳐간다. 일단 지른다. 사실 뭐라도 괜찮다.

- 설렁탕!

-그건 안되요.

아뿔사, 내가 받은건 선택지가 아니라 문제지였다. 정답을 맞추지 못한 나는 정답 확인을 한다.

- 난 뭐든 괜찮은데, 어디로 갈까?

정답은 3번이었다. 나는 치즈, 그녀는 샐러드 돈가스를 하나씩 주문했다. 300cc 맥주잔에 포크와 나이프 숟가락이 담겨 나왔다. 정확히 입에 닿지 않을 목부분을 조심히 손으로 집어 나눠주며 그녀가 물었다.

- 오빠 여자친구랑 잘 헤어졌어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내가 괜찮냐는 건지, 걔가 괜찮냐는 건지, 상황이 괜찮았냐는 건지, 헤어지길 잘했냐는 건지. 좋은 헤어짐이란 무었인지, 그런게 존재하기는 하는지. 이럴땐 역시 팩트를 이야기하는게 최고다. 약간의 미화가 들어갈 것임을 직감한다.

- 내가 지난 일 중에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데, 딱 하나 후회하는게 있어.

- 그 언니 만난거요?

너도 땡.

-아니, 헤어지자고 한거. 이건 참 미영이가 나한테 맨날 놀리는건데...

돈가스를 잘라 먹는 동안 열심히 지난 날들을 적당히 앞뒤 잘라서 소스를 묻혀서 들려줬다. 그냥 듣기엔 앞뒤가 늘어지니까. 치즈 돈가스는 맛은 있는데, 참 마무리가 굳어 딱딱해진다. 더이상 할 말이 없을때쯤, 열심히 샐러드와 돈가스를 분리하고 정리하며 반응하던 그녀가 입을 연다.

- 얼마 전부터 4개월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한테 연락이 와요.

미디어를 통해 한 번 쯤 들어봤을 이야기였다. 요는 '내가 줬던거 다 내놔' 였다. 사람은 이별 후에 자신의 지질함을 본다고 한다. 나도 어디가서 지질함이라면 한 밑바닥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물론 다른 관점에서 보면 꼭 그런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지나치게 합리적이면 그럴 수도 있을까. 난 모르겠다. 적어도 정황상 이 스토리의 안타고니스트는 그가 확실하다. 고로 그는 찌질이다.

이야기는 카페에서도 이어졌다. 나의 비루한 조언에 동의한 그녀는 그에게 전화해 모든 감정을 해소하기로 했다. 영수증 뒷면에 카페 주인에게 빌린 펜으로 할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다. 적다 직직 긋다를 반복한다. 이러다가 논술문이라도 적나 싶었는데 이내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한다. 중요 표시? 시험은 사람을 이리도 패턴화 시킨다.
잔잔한 피아노 반주의 음악이 흐른다. 남자 보컬의 너 없으면 안된다는 조금은 뻔한 가사다. 내 앞에서 그녀는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하며 혼잣말 중이다. 개같은 어떤 오빠도 그렇지는 않았다느니 하며 열내다가, 치즈케익을 먹으니 너무 맛있어서 화가 사그라든다며 식었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자율신경계에 이상이 생기면 감정기복이 심해진다는데, 걱정이 된다.

- 전화하고 올게요.

벌떡 일어나서 그녀는 카페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흐르던 음악이 바뀌기 전에 그녀가 돌아왔다. 전화를 받질 않는단다. 사실 그 놈은 게으르고 잠이 많은 놈이었다. 또 한 번 당한 것같아 분해하는 그녀를 진정시킬 필요는 없었다. 아직 테이블엔 몇 조각의 치즈케익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녀는 원고를 몇 번이고 노려본다. 쌍꺼풀이 없고 약간 눈꼬리가 올라간 눈이다. 흔히 말하는 고양이상. 그중에 추운 지방에 살 것같은 단모종 고양이다. 마지막에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할 것 같은 패기로 하나 하나 그 놈에게 할 말을 내게 하기 시작한다. 논리적 근거로 조목조목 말 할 심산인가보다. 짜증과 평온을 반복하는 그녀를 보니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저렇게 감정 표현을 해본게 언제더라. 꽤 오래전인것 같다. 감정을 검열하고 삼키는게 버릇이 됐다. 첨삭하듯 정정해 주고 싶은 부분들이 있지만 커피와 함께 다시 되삼킨다. 그녀는 성난 코브라처럼 독침들을 뱉고, 나는 반추동물처럼 되새김질을 반복한다. 문득 카운터 펀치가 떠올랐다. 그래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 자존심이 팍 상할만한 말을 하고 끊어버려. 그래야 연락이 안오지.

- 어떤 말이 자존심이 상해요?

-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나보다 만나본 네가 더 잘 알걸?

거짓말을 했다. 사실 하나 있다. '너 존나 못해.' 이 한마디면 그의 자존감은 아마 블랙홀마냥 수축하겠지. 높은 확률로 밤마다 다른것도 수축하겠구나. 그 후 그에게 일어날 후유증들이 차츰 떠오르더니 그는 결국 절망하여 자살한다. 결국 차마 입 밖으로 튀어 나오지 않는다. 눈싸움하는 동네 꼬마에게 돌이 들어있는 눈뭉치를 쥐어지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또 다시 돌을 삼켰다.

- 오빠는 무슨말 들을 때 자존심 상해요?

그걸 내 입으로 말하겠니? 어물쩡 대화의 초점을 돌렸다. 얼마간 이어진 대화로 그녀의 화는 조금 가라앉은듯 싶었다. 내 시간 뺐은게 미안하다며 그녀는 남은 커피를 쭈욱 들이키고 얼음을 와그작 씹으며 짐을 챙긴다. 각자의 갈림길 전까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잘 해결하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책을 읽다가 문득 결과가 궁금했다. 메세지를 보냈다.

[ 잘 해결했어? ]

이제 곧 전화를 하기로 했다는 답장이 왔다. 응원의 문자를 보내고 다시 책을 폈다. 두 장쯤 넘겼을까, 그녀의 이름이 휴대폰 바탕에 떠오른다. 담배 한 대와 라이터를 챙겨 베란다로 향했다. 적당히 어둡고 적당한 소음. 불을 붙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 나 어떻게 해요. 흐엉.

우는 건가? 웃는 건가? 그녀는 도무지 분간하기 힘든 소리를 가끔 내며, 하지만 말할때 만큼은 절제하며 이야기했다. 물론 절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할 말은 다 했으나 그 새끼가 먼저 끊은게 너무 억울했다. 통화하다 숨 고르기 하다가 반복하기를 몇 번.

- 잘 생각해봐. 이제 모든 상황은 끝났고, 이제 네가 잊으면 완전 끝이야.

그녀는 마지막에 당한 먼저 끊음의 설움에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책 읽는건 조금 미뤄야 함을 직감했다.

- 뭐 마실래?






어두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실컷 소리지르고 욕하고 울었을 그녀가 저 언덕 위에서 내려온다. 눈 주위가 빨갛게 부어있다.
단 것을 추천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탄산수를 집었다. 페리에 정도 집었으면 좀 더 마음이 편했을까, 계산대에 내민 초정리 탄산수 두 개는 왠지 여운이 남는다. 계산이 끝나자마자 드드득 뚜껑을 열고 꼴딱 삼킨 후, 그녀는 통화로 하지 못했던 감정 전달을 시작했다. 너무 올라오면 갑자기 멈춰 주저앉고 울었다. 사람이 참 많이도 지나갔다. 그냥 지나가도 나쁜놈처럼 보일텐데, 앞에 여자애가 주저앉아 울고있으니 난 진짜 나쁜새끼가 되었다.
청부 살인을 하고 싶다는 둥, 오빠가 있으면 밤길에 뒤에서 패주고 싶다는 둥, 몇 번의 끔찍한 가상 복수 후에 그녀는 조금 진정이 된 듯 싶었다. 그녀는 그와 쌓은 추억들 조차 모두 더러워졌다고 했다.
그녀의 질문이 떠올랐다.
"오빠 여자친구랑 잘 헤어졌어요?"
나도 그 때 그녀에게 그렇게 나쁜놈이었을까.
그녀에게 우리 추억은 이미 더럽혀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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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짧글 2016. 5. 19. 01:38

그는 불안했다. 애초부터 그는 그녀와 다른 해상도를 가진게 아닌가하는, 혹은 어쩌면 그녀는 그와 같은 생김새를 한 다른 종이 아닐까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사고의 도구는 이미 그녀에게 사고의 대상이었고, 그녀의 전제를 그는 탐구했다. 끝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수치심, 열등감이나 자기혐오 따위의 뿌리에서 경외라는 싹이 틔워올랐다. 부정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향해 이따금씩 나타나던 리비도는 흔적을 감췄다.
그녀의 손이 움직일때마다 투명한 피부를 통해 보이는 푸른 혈관들만이 그의 망막에 투영되었다. 그녀의 손에 잡힌 펜은 무언가를 써내려갔고, 무너진 바벨탑에서 그와 그녀는 다른 층에 있었는지 흰 종이 위 잉크의 흔적은 그에게 아무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는 기면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기저를 느낄때마다 그는 잠을 청하곤했다. 그는 잠들고 싶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소크라테스처럼 그에게 질문했고, 그는 어서 아고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느려지던 시간이 마침내 수렴했을때, 그와 그녀는 다시 평등한 관계가 되었다. 그는 매일 밤 열리는 이 장에서 그는 그녀와 동등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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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 짧글 2016. 5. 19. 01:10
- 포장이세요?
- 네.
천장 아래로 주욱 매달려 있는 메뉴판을 탐색한다. 매운 떡볶이, 달콤 떡볶이... 더 읽을 필요도 없다. 내 목적은 분명하니까.
- 매운 떡볶이 세트로 주세요.
2900원을 카드로 결제하기에는 모양이 빠지는듯 싶어 세트를 주문했다. 떡볶이와 튀김과 쿨피스. 알찬 구성이다.
- 매운 정도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 가장 매운걸로 주세요.
내 목적은 분명하다. 매운게 먹고 싶다.
-4신 말씀하시는 거죠?
계산대 앞에는 각 매운 정도의 묘사와 함께 단계가 쓰여있다. 1신, 2신, 3신, 사신...사신? 숫자가 아니라 '죽을 사' 가 한자로 쓰여있다. 죽긴 싫다.
-아뇨. 3신으로 주세요.
필요없는 쿠폰을 받으며 홀 구석 자리에 대충 앉았다.
-포장이요.
꽤 묵직한 떡볶이 포장을 들고 밖을 나왔다. 날씨가 좀 선선해진 탓인지 나무 접붙인것마냥 붙어다니는 연인들이 늘었다. 하지만 부럽지 않다. 내 오른손엔 떡볶이가 들려있다.
셋팅을 시작한다. 튀김이 든 종이 봉투를 대충 찢어 내용물을 확인한다. 오뎅, 만두, 김말이가 들어있다. 젓가락이 보이지만 일단
만두 하나를 입에다 우겨넣는다. 와작. 바삭하다. 현재 인류가 바삭함을 좋아하게 된 근본에는 풍뎅이류의 겉껍질이 단단한 곤충을 씹을때 그 껍질이 부숴지며 느껴지는 식감이. 아, 벌레 먹는데 만두 생각은 그만해야겠다. 뜨거운 만두속이 입안에 떨어진다. 삼키는 것도 씹는 것도 아닌 요상한 구강 운동을 하고 난 후에야 적당히 기름진 만두의 맛이 느껴진다. 그 사이에 이미 셋팅은 끝났다. 나무 젓가락을 조심히 쪼개고 타겟을 찾는다. 오뎅, 긴 떡, 조랭이 떡. 조랭이 떡의 허리 쯤 되어 보이는 잘록한 부분을 젓가락으로 집고 입에 가져다 넣는다. 약간 딱딱한 감이 있지만 나쁘지 않다. 양념이 적게 묻어서 인지, 뭐라 확정할 수 없는 맛이 난다. 긴 떡을 집어 반쯤 씹는다. 쌀떡 특유의 쫀득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동시에 매운 떡볶이 특유의 농밀한 캡사이신이 느껴진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감하고 웃통을 벗는다. 튀김먹고 떡볶이 먹고 떡볶이에 튀김 묻혀먹고 하다보니 어느새 삼분의 일쯤 해치웠다. 혀는 이미 맛을 느끼는 기관이 아니게 되었고, 얼굴. 아니, 머리 전체에서 땀을 주로 한 분비물이 배출되고 있다. 코를 풀어보고 눈물도 닦아보지만 이미 시작된 자율 신경계의
폭주를 제어 할 수는 없다. 쿨피스가 혀에 닿으면 이상한 화학약품 내음이 났다. 이거 어디서 느껴본 적 있는데... 아, 맥주 사탕 내지는 페인트 사탕 특유의 그 내음이다. 내적 갈등이 시작된다. 이걸 마저 먹었다가는 '사신'도 아니고 3신를 먹고 죽은 우스운 얼간이로 내일 저녁 아홉시 뉴스에 나올 것 같다. 동시에 잔반을 남기는 것은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 아이들을 욕보이는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살고 봐야한다.
더 이상의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 아직 뜨끈한 떡볶이를 쏟아 버린다. 건데기가 떨어지고 걸쭉한 국물이 남았다. 호기심에 반모금 정도 마셔본다. 역시 사람은 살고 봐야한다.
욕실로 달려가 입을 행궈본다. 내가 알기로는 매운 맛은 통각이다. 따라서 지금 칫솔질을 했다가는 요단강이 멀지 않을 것이다. 물을 뱉기만 하면 찾아오는 통증에 머금고 뱉고를 반복한다. 거울에는 굉장히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눈은 충혈되어 있고 얼굴 곳곳은 붉게 상기되어있다. 멀쩡히 있어도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을 뚝뚝 떨어지는 땀은 그를 한층 더 불결해 보이도록 하는듯 하다. 통증이 조금 나아질 때쯤 뭐하러 이런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정말 과연 이게 스트레스가 풀리는 걸까 하는 생각도 같이 스친다. 매운걸 먹고 고통을 즐기는 사람은 확실히 마조히스트 성향이 있는것 같다. 확실히는 빼야겠다. 표본이 나 하나인 귀납적 추측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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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 짧글 2016. 5. 19. 01:08
"아, 제가 공부해야돼서."
그녀는 견과류 봉지와 수첩을 내게 건냈다. 이건 드시라면서 수첩을 받아들고 일어섰다. 뜨겁다. 온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자, 보자. 아니, 생각해보자. 그녀와 만난건 약 한 달 전쯤. 정정하겠다. 그녀'를' 만난것으로. 그녀는 독서실 옥상에서 참외를 깎아 먹고 있었다. 참외의 단내는 바람을 타고 내 콧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날 난 백그라운드 스멜과 함께 숙련된 칼솜씨로 참외 껍질을 깎아내리는 그녀의 손을 계속 바라봤다.
다음날일거다. 그 날 역시 그녀는 참외를 먹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계속 바라봤다. 뭔가 피곤한듯한 눈이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비타민A를 섭취하려는 건가.
다음날부터 난 매일 그 시간쯤 옥상에 올라갔고, 그녀는 다음날부터 옥상에 올라오지 않았다.
난 먹이사슬 최하위의 피식자마냥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니기 시작했다. 몇 번의 마주침이 있었지만 둘 중 하나였다. 토끼처럼 도망가던지, 개구리처럼 굳던지.
마침내 그녀를 발견한 어느날, 아니 오늘. 나는 그녀에게 수첩과 아몬드와 호두, 피스타치오, 여튼 온갖 너트류와 말린 라즈베리가 들어있는 견과류 봉지를 건냈다. 그곳은 정숙해야 하는 독서실 자습실이었고, 수첩에는 [친해지고 싶어요! 전화번호좀 알려주세요!] 라고 적혀있었다.
칼 잘다루던 그녀는 딱잘라 말했다.
"아, 제가 공부해야돼서."
이곳은 정숙해야 하는 자습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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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꿈 짧글 2016. 5. 19. 01:04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친구 두 명과 동창 여자애를 죽인듯했다. 그 꿈이 얼마나 생생했냐면 일어나는 순간에 이곳이 내 방 침대인지 교도소인지 구분해내야 할 정도였다. 꿈의 마지막 장면은 이랬다.

나는 시체를 유기해야 할 방법을 생각하며 본가 화장실에 들어와 변기에 앉았다. 집에 들어가 화장실에 가는 동안에 가족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이상함을 느꼈다. 화장실 안 텔레비전에서는 학생 세 명이 홧김에 동창생 여자를 죽였다는 뉴스가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점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 집 화장실엔 텔레비전이 없으며, 그들이 잡혔다면 내가 화장실에서 뉴스를 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꿈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갑자기 내 앞에 여자의 음부가 나타났고, 거기에서 강아지 거시기 같은 것(분명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이 튀어나오더니 꿈은 끝났다.

그야말로 개좆같은 꿈이다. 이런 꿈을 개꿈이라고 하나? 라는 생각에 피식. 담배꽁초를 휴지통에 넣고 다시 침대에 누워 기억을 되살렸다. 살인의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 궁금했다.

꿈은 깨어나는 순간 그 내용의 대부분을 상실한다. 나에겐 비단 꿈뿐만이 아니지만 말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곰곰이 되새겨본다. 친구는 내게 말했었다. 너는 시체유기담당이야.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너희는? 뉴스에서처럼 홧김에 죽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입에서 한 명의 역할이 죽이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걔네집 앞마당에 묻을까? 따위를 지껄이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무거운 것을 매달아서 강물에 버릴까 따위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체유기를 실제로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실패했으니 걸리지 않았을까.

몇 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니, 방금 만든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서울 어딘가 시가지에서 약국을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기시감을 느끼는 장면, 내가 어떤 남자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고 집에 데리고 왔다가 그가 타고 온 전동보드를 구경만 한다고 한 후에 그냥 타버리니 기분 나빠하며 집을 나가버린 장면 등 살인사건과는 하등 관계없는 장면들뿐이었다.

거실에서 뉴스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지난 꿈을 기억해내는 것은 무리임을 직감했다. 꿈에 집중하려 이불속으로 머리를 더욱 파묻었지만 소용없었다. 의식하는 순간 내 청각의 주파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맞추어졌다. 뭐라고 하는 지는 전혀 분간이 되질 않았지만 그 말투로 볼 때 스포츠뉴스 같았다. 다시 기억을 해내려 집중을 해봤다. 입에서 나오는 더운 숨이 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얼굴에 부딪혔다. 그 상태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깼다. 분명 뭔가 또 기억이 났었는데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났었는데 모르겠다는 말은 과연 의미가 있는 말인가.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기상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찬물에 얼굴을 비비면서 계속 꿈을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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