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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발화제다. 순간의 분노는 쌓여 있던 연료를 태운다.
어지간한 분노는 발화점이 높은 사람을 불 붙게 하지 못한다.
분노로 인한 발화는 어마어마한 열정을 태운다.
분노로 인한 발화로 인해 타는 열정은 매캐한 연기를 동반한다.
매연은 스스로도 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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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모장에 적던 것들을 옮긴다.
0. 순서의 나열은 의미가 없다.
1. 우울과 외로움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
2. 사람은 온전히 홀로 남았을 때 죽는다. 죽음은 사람이 온전히 홀로 남은 상태이다. 죽음은 완
전한 외로움이며, 죽음은 완전한 우울이다.
3. 비물질적인, 그러니까 정신적인 외로움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4. 고독은 홀로 외로운 상태를 뜻하지만, 사람을 서서히 잠식하는 독일지도 모른다.
5.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마지막에는 자신을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6. 외로워서 우울한 지, 아니면 우울해서 외로운 지 그 인과관계를 고민했다. 약을 먹으면 증상 -우울은 병이기에-이 나아진다는 것을 보면 외로움과 우울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약 안먹고도 그 정도의 효과가 있는 것은 많다. 정신 없이 무언가에 몰두 하는 것이다. 그것이 게임이든 일이든. 게임에서 접속을 종료하거나, 일이 끝나면 그들에게는 다시 고독이 찾아 온다. 우울도 함께 온다. 쉼 없이 일이나 게임에 몰두하는 그들은 약을 제때 챙겨 먹는 사람과 본질적으로 같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즉, 우울하지 않기 위해서다
7. 정신적인 고독이란 무엇일까. 타인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걸까. 선천적으로 타고난 개인의 성향일까. 지나온 환경속에서 겪은 상처의 결과일까.
8. 우울과 외로움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단어의 뉘앙스가 다르므로 그 나름의 효과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지금 우울하다' 보다는 '내가 지금 외롭다'가 덜 부정적으로 다가온다.
9.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떤 것이 현실적 이거나, 물리적 이거나, 물질적일 필요는 없다.
10. 국소적인 관점에서의 우울도 국소적인 외로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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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성큼. 그렇게 걸었다.
팔도 휙휙 젓는다.
아직 그녀는 낯선 익숙함이다.
첫 대면.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녀의 반응.
나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녀는 앞서서 걸었고, 반 보 쯤 뒤따라 걸었다.
나는 얼음컵과 콜라를 준비했고,
그녀는 걸으며 얼음컵에 콜라를 부었다. 능숙하다.
빈 캔을 구겨서 내게 줬다.
나는 구겨진 캔을 들고 따라갔다.
소리로만 듣던 거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어디고, 누구와 뭐했고,
잘도 떠든다.
내가 열어야 하는데, 하는 동안 그녀는 몸으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성큼성큼 걸었다.
내 손엔 여전히 구겨진 캔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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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동안. 그러니까 의식하지 않는 영역에서의 사고의 결과가 발견될 때가 있다. 요점만 정리된 보고서를 받는 느낌이 든다. 농축된 사고의 결과물에 나는 짧은 순간 많은 것들을 받아들인다. 인지 밖의 나의 사고의 결과는 새로운 것들을 던져준다.
스무살쯤에 나는 행복이 자기만족이라고 확신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확신은 힘을 더해갔다. 타인의 시선에 크게 영향 받지 않는 성격은 나를 큰 불만을 느끼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내 선택과 내 평가만으로 만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궁금한게 생겼다. ‘왜 나는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궁금증의 결론은 이런 식으로 났다. 역시 나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라던가, 나는 멘탈이 강해서 등등 내게 좋은 쪽으로 말이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무의식은 다른 결론을 냈다. 나는 타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평가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고. 더 타당하게 느껴졌다. 사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무의식에서 떠오른 것은 마치 어떤 게시처럼, 판단 이전에 이미 수용되어있다. 그 이후 나는 내가 인정하는 타인과 그렇지 않은 타인을 생각했다.
나는 꽤 오랜 시간을 혼자 살았다. 물리적으로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혼자 살았다고 확신한다.
뒤늦게 인간 세상에 내던져지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는 피할 수 없는 타인의 평가들을 받아야만 했다. 일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가 인정하고 말고는 전혀 상관 없었다. 우울감이 점점 나를 침잠해왔다. 만족을 추구하던 삶은 불만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삶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제는 아주 가끔 만족을 위한 고민을 한다. 회피도, 극복도 대가가 크다. 이대로 멈춰서 현상 유지만 하는 것도 불만족의 범위 안이다. 그렇다. 나는 서른 살이 넘어서야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지금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드는 생각. 그동안의 업이 돌아온 것이다. 생의 짧은 주기에서 조차 이렇다.
던져진 다음 질문은 이렇다. 진정한 만족을 위한 방법은 현실적인 노력을 통한 상황의 극복인가, 아니면 정신적 수양, 혹은 사고를 통한 마음의 안정인가.
이렇게 나는 다른 질문을 만들어 둔 채로 현실속에서 바둥거릴거다.
무의식의 응답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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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과 다른 것.
같은 것인 줄 알았지만 다른 것.
다른 것인 줄 알았지만 같은 것.
본질, 또는 개념을 보고 있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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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있다. 그래. 그것은 A이다. 그렇다면 A가 아닌 나머지가 있다. A는 단일 대상을 나타내는 것 일 수 도 있고, 어떤 속성을 나타내는 것 일 수 도 있다. 간단한 예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다.
쓰나마나 한 이런 이야기를 쓴 이유는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을 분류해보려 하기 때문이다. 그냥 분류하면 될 걸 굳이 저렇게 쓴 이유는 가치 판단에 대한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는 노력이다.
자, 이제 나누어보겠다.
사람들은 생산자와 비 생산자로 나뉜다. 세부적인 구분을 하려니 복잡하다. 내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부분은 어떤 컨텐츠, 특히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한 부분의 것들이다.
문득, 일이 끝난 후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그 결론. 다른 사람들이 만든 컨텐츠를 소비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팟캐스트를 듣고 유튜브를 보다 보면 잠에 들어여만 하는 시간이 되는 날들의 모임. 꽤 긴 시간동안의 내 일상이었다.
보고 듣는 동안 즐거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느껴지는 작은 불편함이 있다. 그 불편함은 내가 오로지 남들의 컨텐츠를 소비만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생산할 수 있는 컨텐츠는 어떤 것이 있는가. 메타인지가 발동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나에 의해 그 대상은 몹시 소박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는 것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한 장의 사진 업로드가 주는 컨텐츠 생산의 즐거움은 대단하다. 각자의 가치와 미감을 담고 있는 작품들인 것이다. 엄마가 된 친구들이 육아 일기를 마구 올리는 것들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드문 업로드와 압축적인 메세지에 ‘멋’을 느낀다.
원래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 슬쩍 생각했던 마무리는 ‘모두 컨텐츠 생산을 함으로써 그 즐거움을 누리자.’ 였다. 하지만 갑자기 인스타 취향을 고백하고 나니 현타가 왔다.
sns 를 아주 작은 단위의 컨텐츠 생산활동이라고 두자. 물론 그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큰 범위, 혹은 상위의 컨텐츠 생산을 해보자. 나에게 말하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추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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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 다른 미감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의 미감을 놓고 봤을 때, 대부분은 학습된 것이고, 나머지 부분은 개인마다 다르다. 개인의 미감을 취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개인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아름다움의 추구는 각자의 어떤 철학 보다도 본능적인 것이다. 아니, 철학도 아름다움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자신의 미감에 맞지 않는 것을 피하고 반대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학습된 미감은 대체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냥 검은 티셔츠보다 브랜드 로고가 작게 박힘으로써 느껴지는 어떤 더 나은 느낌 말이다. 작은 로고는 많은 함의이며, 어떤 가치를 지니고, 그것을 아름답게 느끼게 한다.
우리는 모두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은 우리 자체, 우리의 삶인 셈이다.
여기부터는 나의 미감이 들어가게 된다.
대부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러니까 앞에서 브랜드 로고로 대표되는 것들로 꽉 채운 라이프스타일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 돈은 희소하며 희소한 것은 가치가 있으며 가치가 있는 것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삼단논법에 따르면 돈은 아름답다)
하지만 우리 모두 예술가라는 점에서 더 나은 차원의 예술은 엣지가 있어야 한다. 브랜드 로고 라고 한정지을 수 없는 어떤 비언어적 감동을 줄 수 있을때 우리는 더욱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유행이라는 것을 아름답다고 학습하면서도 끔찍하게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흔한 것은 아름답지 않다. 정강이까지 덮는 거대한 패딩이 길거리를 덮는다.
지금 나는 롱패딩이 혐오스럽기만 하지만, 곧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혐오하게 될 것이다.
특별한 어떤 것이 우리를 아름답게 한다. 그 어떤 것은 각자의 미감, 그 중에서도 학습되지 않는 영역에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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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나를 뭔가 바꿀 줄 알았다. 하지만 여행은 나를 닮아 있었다.
처음, 이틀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기간은 삼박 사일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았다. 그렇게 왕복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제주 공항에 도착해서야 나는 시내가 어디인지 찾아봤고, 시청 앞 숙소를 잡았다. 저녁 식사 후 들어갔고, 다음날 아침까지 나오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느즈막히 나와 스쿠터를 빌렸다. 달렸다. 앞으로 앞으로. 처음엔 운전할 때와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계속 달렸다. 스쿠터를 이틀 빌리기로 했으니까 반 바퀴는 돌아야 했다. 전립선이 걱정되어 잠깐 쉬다가 알았다. “재미가 없다.” 즐겁고 행복한 나홀로 제주 여행 사진을 남길 자신은 있었다. 사진 아래에 조금은 시크한 문구 몇 개 넣어주면 될거다. 그런데 재미가 없다. 여행 자랑을 아니꼽게 보는 나지만, 숨기고 다니는 여행은 제로 그 이하였다. 첫 날 먹었던 햄버거는 끔찍했다. 빵과 고기와 양상추가 섞인 덩어리가 목에 걸리면 사이다로 밀어내리는 식사였다. 모든 음식이, 모든 풍경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망한 여행이었다. 나는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하루 당겼다. msg를 전혀 첨가 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핸드메이드라는 레스토랑에서 돈가스를 꾸역꾸역 씹으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이 모든 끔찍한 것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혼자, 문제는 내가 혼자라는 것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왜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까. 과연 그게 배우는 것일까. 스스로 늘 개인주의라고 포장한 폐쇄성이 나를 점점 고립 시켰는지 모른다. 어디냐, 뭐하냐, 살아있냐 등의 친구들의 메세지를 쭉 봤다. 아직은 답장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아직은 아직도 아직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스를 외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과연 나는 혼자서 살 수 있는가? 모르겠다. 언제부터 이 대답이 바뀐걸까.
나에게 해야 할 질문이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아직 하지 않은 질문이지만 이미 한 질문이나 다름 없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미 대답한 것이나 다름 없다. 계획 없이 비행기표를 사고, 계획 없이 스쿠터를 빌리고, 계획 없이 비행기표를 취소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고, 이대로면 이대로 살겠지. 그럴 것이다. 스스로 진단 하기에도 심각한 상태다. 뭔가 치료가 필요하다. 많은 실마리가 머리 속에 날아다닌다. 하나를 쥐었다가 놓고, 다른 하나를 쥐었다가 다시 놓는다. 전부다 내가 피해 왔던 것들이다. 어떤 하나를 쥐어 당겨야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재수 없으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를 쥐어 당겨야 할 것이다.
바닷가 풍경이 바로 보이는 애월에 있는 스타벅스에 왔다. 건물도, 바다도, 건물에서 보이는 바다도 사진을 찍으면 아주 자랑할 만하다. 하지만 여기 2층에서 내가 유일하게 좋다고 느끼는 것은 아디다스 삼선 레깅스를 입은 저 오른쪽 자리 아가씨 뿐이다. 나는 스타벅스를 싫어했다. 자리가 불편해서 그랬다. 친구의 골드 회원 카드를 본 순간 나는 매일 스타벅스에 갔다. 그 황금색 반짝이는 카드를 가지고 싶었다. 나름의 문구를 새길 수 있었다. 나는 불가능은 없다며 카드에 새겼고, 그 후로 수많은 불가능들에 부딪혀 깎였다. 어쨌든, 나는 스타벅스에 오면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오늘의 커피의 차가운 버젼인데, 매장마다 그 날의 원두가 다르다. 거의 캐냐인 것 같긴 하다. 추출방식도 에스프레소가 아니라서 평소에 마시던 맛과 조금 다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메세지는 이거다. 나는 삶의 무작위성을 좋아한다. 내 기대를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고, 벗어나기를 바라기도 하며, 그래서 기대를 하지 않기도 한다. 아이스커피를 주문한 내게 스타벅스 직원은 내게 질소 커피는 어떻냐고 물었다. 나는 질소커피를 마셨다. 왜 스타벅스 코리아는 nitro를 ‘나이트로’라고 한글로 적어 놓은 걸까. 화학식에서는 니트로 아닌가. 궁금했지만 별 게 아니라 찾아보지는 않았다.
돌아왔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고, 드라마를 몰아서 봤다. 정적이 싫었고, 공복이 싫었다. 당연히 마음은 불편했다. 당연한가? 당연한게 맞는건가? 드라마가 이끌어주는대로 나는 슬펐다가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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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과 영화를 봤다. 살인자의 기억법. 그 원작 소설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사실 그보다 작가를 더 좋아한다. 에상대로 영화는 원작이 역시 더 낫다고 느껴졌다. 중간에 급한 일이 생겨서 한 삼십 분 정도 일찍 극장을 나왔더라면 영화를 극찬 했을 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여운은 빨갛고 얇은 그 매력적인 책을 찾았던 날의 기억으로 시작됐다.
그 날은 1월 1일이었다. 아니, 12월 31일 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노량진에서 시험을 준비하는 수천 명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하자면 그 날은 해의 마지막 날, 또는 해의 첫 날이었다. 모를 이유로 나는 늘 그런 날을 특별한 날이라 여긴다. 때문에 스스로 그 날 휴가라며 하루 쉬기로 했었다. 용산에서 조조영화로 변호인을 봤고, 오열했다. 노량진역 1층에 위치한 서점에서 내 부은 두 눈은 매대에 누워있던 빨간 책을 발견했다. 매력적인 제목. ‘살인자의 기억법’ 나는 김영하 작가를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빨간 표지도,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특히 작가의 말의 감격은 내가 그 책을 당장 들고 나가게 했다. 카페에서 단숨에 읽었다.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다니. 질투가 났다. 웃긴 일이다. 내가 도대체 왜 소설가가 글을 잘 쓴다는 사실에 질투를 느끼는가. 나보다 해석학 문제를 잘 푸는 스터디원에게는 전혀 느끼지 않는 질투를 말이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김영하 작가가 쓴 모든 글을 사 모았다. 나중에 혼자 규정지었다. 질투는 욕망의 투영이다. 나도 글을 잘 쓰고 싶다. 그러고 보면 그 전에도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어느 늦가을이었다. 갑자기 생각난 아이디어와 에너지는 그것을 소설로 완성시켜야 한다며 하늘이 보낸 게시처럼 다가왔다. 나는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엄청난 생각을 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흥분됐다. 꾸역꾸역 최소 분량을 맞춘 내 첫 소설은 어느 신문사로 배송되었다. 이듬해 신춘문예 당선작은 그렇게 나와 관계 없이 지나갔다. 몇 년 후, 고시 생활 동안 내 취미는 짧은 글을 쓰는 것 이었다. 대부분이 블랙 코미디였다. 내 한심한 꼬락서니를 차갑고 건조하게 적었다. 나는 늘 내 글에 만족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책을 좋아하는 것이 멋진 일이기도 하다. 책을 좋아한다는 그녀를 만났었다. 나는 그녀에게 작은 수첩에 편지를 써줬다. 그리고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책을 좋아한다는 그녀는 독서 용품도 좋아했다. 문학동네 인스타그램에 언제나 좋아요를 눌렀고,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했다. 몇 달 동안 그녀는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물론 좋아한다는 그 작가의 책도 읽히지 않았다.
글은 읽혀야 그 의미가 있다. 나는 내가 쓴 글을 친구들에게 퍼다 날랐다. 다행히 좋아하는 친구들이 몇 정도 있었다. 하지만 수험 스트레스는 곧 내 취미조차 잡아먹었다. 그런데 이 소설가는 내 친구도 아닌데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게 했고, 내 글이 아니지만 나를 만족시켰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얼마나 멋있는가. 그가 만든 종이뭉치가 아니라 그의 머리와 가슴과 영혼이 만든 이야기가 나를 감동시킨것이다.
그래,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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