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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동안. 그러니까 의식하지 않는 영역에서의 사고의 결과가 발견될 때가 있다. 요점만 정리된 보고서를 받는 느낌이 든다. 농축된 사고의 결과물에 나는 짧은 순간 많은 것들을 받아들인다. 인지 밖의 나의 사고의 결과는 새로운 것들을 던져준다.
스무살쯤에 나는 행복이 자기만족이라고 확신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확신은 힘을 더해갔다. 타인의 시선에 크게 영향 받지 않는 성격은 나를 큰 불만을 느끼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내 선택과 내 평가만으로 만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궁금한게 생겼다. ‘왜 나는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궁금증의 결론은 이런 식으로 났다. 역시 나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라던가, 나는 멘탈이 강해서 등등 내게 좋은 쪽으로 말이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무의식은 다른 결론을 냈다. 나는 타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평가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고. 더 타당하게 느껴졌다. 사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무의식에서 떠오른 것은 마치 어떤 게시처럼, 판단 이전에 이미 수용되어있다. 그 이후 나는 내가 인정하는 타인과 그렇지 않은 타인을 생각했다.
나는 꽤 오랜 시간을 혼자 살았다. 물리적으로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혼자 살았다고 확신한다.
뒤늦게 인간 세상에 내던져지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는 피할 수 없는 타인의 평가들을 받아야만 했다. 일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가 인정하고 말고는 전혀 상관 없었다. 우울감이 점점 나를 침잠해왔다. 만족을 추구하던 삶은 불만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삶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제는 아주 가끔 만족을 위한 고민을 한다. 회피도, 극복도 대가가 크다. 이대로 멈춰서 현상 유지만 하는 것도 불만족의 범위 안이다. 그렇다. 나는 서른 살이 넘어서야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지금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드는 생각. 그동안의 업이 돌아온 것이다. 생의 짧은 주기에서 조차 이렇다.
던져진 다음 질문은 이렇다. 진정한 만족을 위한 방법은 현실적인 노력을 통한 상황의 극복인가, 아니면 정신적 수양, 혹은 사고를 통한 마음의 안정인가.
이렇게 나는 다른 질문을 만들어 둔 채로 현실속에서 바둥거릴거다.
무의식의 응답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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